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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의 주인은 누굴까 by 김민철아하 에세이 2023. 1. 2. 13:34
여기, 어젯밤 열심히 생각한 아이디어가 있다. 오늘 아침 지하철 안에서 번뜩인 아이디어도 있다. 잠깐 내가 천재가 아닐까 생각하게 만든 아이디어도 있다. 그리고 그 옆에 다 완성하지 못한 채로 내민 아이디어도 있고, 부끄러워서 차마 아는 척하고 싶지도 않은 아이디어도 있다. 그 모든 아이디어들이 회의실 책상 위에 사이좋게 놓여 있다. 이 아이디어들의 공통점은 오직 하나. 방금 원래의 주인을 떠났다는 것. 그게 어떤 아이디어건 간에 당신이 당신의 아이디어를 말하는 것과 동시에 회의실 안의 구성원 모두가 아이디어들의 주인이 된다. 혼란스러운가? 하지만 이 원칙에 동의해야만 회의는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다.
상상해보라. 처음 자기 아이디어만 고집하는 한 사람을. 마치 자기가 낸 아이디어만이 정답인 양 우기는 한 사람을. 회의실에 들어왔으면서 아이디어의 소유권을 동료들에게 넘길 생각이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의 아이디어에 대해 지적하면 그 사람은 높은 확률로 그것을 자기 자신에 대한 비난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회의는 덜그럭거린다. 그나마 팀원이 그럴 때에는 상사가 정리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상사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답이 없다. 서서히 팀원들은 입을 닫는다. 모두 상사의 말을 받아 적고만 있다. 별다른 도리가 있나. 그때쯤이면 대부분은 진심을 거두고 하라는 일만 하게 된다. 어쩌겠는가, 상사가 자신의 말만 맞다는대.
회의실에서는 ‘내 아이디어’가 ‘우리 아이디어’로 변한다는 걸 받아들이면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우선 좋은 아이디어를 알아보는 눈이 생긴다. 누군가가 나의 아이디어를 좋게 봐주길 기다리는 대신, 수많은 우리 아이디어들 중에서 가장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골라낼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냉정한 눈으로, 넓은 마음으로. 왜? 이건 모두가 우리 아이디어니까. ‘우리 아이디어’라는 라벨을 달고 다른 팀을 만나고, 광고주를 만나야 할 테니까, 우리 아이디어가 어디서도 기죽지 않으려면 가장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골라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좋은 점은 또 있다. 사람이 사라진다. 아이디어에서 사람이 빠지고 아이디어의 핵심만 보게 되는 효과가 있다는 뜻이다. 사람이 빠지면 우리의 태도는 명쾌해진다. 누가 처음 낸 아이디어든 상관없다. 오직 아이디어만 보며 자유롭게 의견을 낼 수 있게 된다.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아이디어를 놓고 어떤 부분을 보완하면 좋을지, 어떤 문제가 예상되는지 마구 이야기를 한다. 이미 아이디어의 소유권은 우리 모두에게로 옮겨졌으니, 비판은 당신을 향한 비판이 아니고, 부족한 부분도 당신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다. (물론 칭찬이 있다면 그건 꼭 개인적으로 가져가도록 하자. 그 정도의 뿌듯함은 챙겨도 된다.) 당신이 처음 낸 아이디어에 다른 이의 아이디어가 덧붙어도 기분 나빠할 이유가 없다. 우리의 아이디어가 더 좋아지고 있는 중이니 말이다.
이기적으로 계산을 해봐도 ‘우리 아이디어’ 정책은 상당히 이익이 된다. ‘내 아이디어’만 고집했을 때 그 아이디어가 오롯이 실현될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내 아이디어의 성공만을 인정한다면 몇 년을 일을 해도 성과는 고작 한 줌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아이디어’로 계산을 한다면? 뛰어난 팀 동료의 아이디어도 ‘우리 성과’가 되고, 나의 부족한 아이디어에도 다른 이들의 아이디어가 덧붙어 놀라운 ‘우리 성과’가 될 것이다. 별로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어느새 우리의 성과는 양손 가득 담아도 넘쳐날 지경이다.
이 좋은 정책이 회의실 안에서만 적용된다는 것이 좀 아깝지 않은가? 나는 좀 아깝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회의가 끝난 후에도 ‘우리 아이디어’ 정책을 계속 유지하려고 애쓴다. 특히 다른 팀과 회의를 할 때 이 정책 덕분에 나는 주어를 가려 쓰게 되었다. ‘우리’라는 주어를 쓸 때와 ‘나’라는 주어를 쓸 때를 철저하게 구분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다른 팀과 회의를 할 때 이렇게 말한다.
“우리도 그런 의견을 냈었어요.”
(비록 내가 낸 의견일지라도 반드시 ‘우리’라고 말한다. 회의실 안에서 나온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낸 아이디어지만 이거 진짜 괜찮은 거 같아요.”
(분명 아이디어의 원작자는 있지만, 회의실을 거쳐간 이상 ‘우리 아이디어’가 되는 건 숙명이다.)
예외는 있다. 회의 결과를 책임져야만 할 상황이 온다면, 혹은 우리의 아이디어가 벼랑 끝에 서는 상황이 온다면 나는 반드시 주어를 바꿔서 말한다.
“안 그래도 팀 사람들이 그 부분을 이야기했는데, 제가 이쪽 방향이 맞다고 우겼어요. 왜냐하면…”
“제가 그 부분까지는 생각을 못했네요.”
‘나’라는 주어와 ‘우리’라는 주어를 가려 써야 하는 자리가 바로 상사의 자리다. ‘나’라는 주어를 쓰면서 스스로 책임을 다하고, ‘우리’라는 주어를 쓰면서 모두에게 이 일의 책임을 나눠주는 일. 바로 그 일을 하라고 회사에서 팀장에게는 조금이나마 월급을 더 주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은 경우를 너무 많이 봤다. 좋은 결과물에는 ‘나’라는 딱지를 붙이고, 조금만 불리하면 ‘너네’라는 딱지를 붙이는 상사가 얼마나 많은가. 각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저런 윗사람의 지랄맞음을 견디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같은 급으로 떨어질 수는 없지 않은가.
좋은 회의의 원칙은 무엇일까? 회의만 하고 나면 좋은 아이디어들을 툭툭 내놓는 팀들이 있다. 한 명 한 명이 유난히 훌륭한 팀이라서 가능한 일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훌륭한 개인도 우리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나’를 내려놓고 ‘우리’에 더 집중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를 더 훌륭하게 만드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니까. 이기적으로 생각해도, 이타적으로 생각해도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이만큼이나 남는 장사가 없다.
글. 김민철
『내 일로 건너가는 법』 저자. 주중에는 광고회사 TBWA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고, 주말에는 글을 쓰며 작가로 활동 중이다. 18년간 SK텔레콤, 네이버, LG전자, 일룸, SK에코플랜트 등의 광고 캠페인을 담당했으며 『모든 요일의 기록』, 『모든 요일의 여행』, 『하루의 취향』, 『치즈: 치즈 맛이 나니까 치즈 맛이 난다고 했을 뿐인데』,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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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성장하기'를 주제로 김민철 작가의 에세이가 매월 1회 연재됩니다.(총 6회/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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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팀장으로 이직했습니다
2화 일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는 법
3화 안대차고 건너가기
4화 6시 퇴근법
5화 말 기둥 세우기
6화 아이디어의 주인은 누구일까 (현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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