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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꾸준하지 못할까? 고민하는 사람에게 by. 김신지아하 에세이 2023. 3. 9. 16:51
할 일 말고 ‘한 일’을 기록하라는 말의 진짜 뜻
‘리추얼 플랫폼에서 2년째 기록 리추얼을 운영하고 있다. ‘나만의 기록 서랍 만들기’라는 이름 아래, 각자 자신만의 기록 주제와 장소(서랍)를 정하고 매일 저녁 따로 또 같이 일상을 기록하는 리추얼이다. 나의 작은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지만 혼자서는 꾸준하기 어려워서, 팍팍한 일상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찾고 싶어서, 내 하루가 어떤 디테일로 이루어져 있는지 살펴보고 싶어서.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모인 사람들이 3주 동안 자신의 기록을 인증하며 일상을 나눈다.
같이 하면 혼자 하는 것보다 낫긴 하지만, 매번 인증률 100%를 달성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여러분, 꾸준히 하는 게 어려운 건 원래 국룰이에요!” 하고 위로해보지만 그다지 위로가 되진 않는 모양이다. 인증률이 낮아지면 리추얼 방에서 슬며시 자취를 감추거나 마지막 주에 줌으로 만나는 ‘회고 미팅’에 참석하지 않는 멤버들을 보며 안타까웠다. 기록 생활을 돕는 가이드 역할을 할 뿐인 내게 ‘미안할’ 일도, 스스로 ‘자책할’ 일도 아니기에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올해부터는 노션에 리추얼 회고 양식을 만들어서 공유하고 있다.
멤버들이 기억하기 쉽도록 ‘뿌아보 회고법’이라 이름 붙인 양식은 다음과 같다. 먼저 내가 ‘한 일’을 객관적으로 기록한다. 기록 주제는 무엇이었고, 3주 중 며칠을 기록해 인증률은 몇이다 하는 사실 위주로. 그 다음 뿌듯한 점을 적는다. 첫 시도였는데 달성률이 이 정도인 것을 자축한다거나 드문드문 했어도 기록의 결과물이 남으니 이번 달을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볼 수 있어서 좋다거나. 다음은 아쉬운 점. 자기 전에 기록하려고 했는데 피곤해서 그냥 넘어간 날이 많았다거나 주말에 밀린 기록을 올려보려고 했지만 복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는 점 등을 적는다. 세 번째는 보완할 점이다. 앞서 적은 아쉬운 점을 초래한 ‘이유’를 찾아 어떻게 해결할지 적어본다. 실행 과정에서 내 예상과 다른 부분이 있었다면 그 방식을 버릴 것인지, 새로운 시도로 변형해볼 것인지.
예를 들어 기록하는 ‘시간대’가 나와 맞지 않는 걸 발견했다면 밤늦게 기록하는 대신 아침 출근길 대중교통에서 기록하는 것으로 방향을 수정할 수 있다. 주말에 ‘밀린 일기’를 쓰는 방식이 의외로 취향에 맞았지만 기억이 잘 안 나서 곤란했다면 바쁜 날엔 일기 한 줄, 사진 한 장을 남겨두는 방식으로 추후의 복기 작업을 도울 수도 있겠다. 회고의 마지막 단계는 다음에 올 시간을 준비하는 예열 작업. 이번 달 내 기록에 영감을 준 문장이나 예시를 기록하며 ‘내가 이래서 기록을 하고 싶었지’ 하는 초심을 유지하고, 다음 달에 기대되는 내 모습을 적어봄으로써 미리 기분 좋은 결과를 상상해보는 것이다.
이런 양식을 마련한 건 회고의 본질을 찾아서 멤버들에게 되돌려주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회고의 본질, 그러니까 우리가 굳이 ‘회고’라는 것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한 일을 돌아보면서 좋았던 점은 앞으로도 계속 유지하고, 아쉬운 점은 이유를 찾아 개선해나가기 위해서일 것이다. 경험을 통해 알게 되고 배운 것을 되새기는 데 회고만한 게 없다. 무언가를 계획대로 실천하지 못했다고 해서 ‘별로인 기분’만 안은 채 다음 시간으로 빨리 넘어가기보다, 지난 시간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뿌아보 회고법’은 사실 평소 일기를 쓸 때 종종 활용하던 방식이기도 하다. 특별히 적어둘 만한 것이 떠오르지 않는 날, 일기장 여백에 오늘의 뿌듯한 점과 아쉬운 점, 내일 보완할 점 등을 적곤 한다. 퇴사 후 혼자 일하게 되면서 생긴 회고 루틴이다. 그러니까 내가 나에게 보고하고, 내가 나에게 ‘피드백’ 해주는 시스템이라고 할까. 오늘은 이래서 좋았네, 계속 유지해보자. 이건 이래서 잘 안 됐구나. 그럼 이렇게 바꿔볼까? 하는 식으로.
회사에 다니던 시절엔 업무 일지를 쓰라는 권유가 귀찮기만 했다. 개인의 시간 관리와 생산성을 따지려는 감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회고보다는 보고에 방점이 찍혀 있으니 오늘 하루, 이번 한 주의 일을 회고한다는 게 또 다른 ‘일’처럼 여겨졌다. 해야 하는 일들에 치이는 대신 자율성의 시간을 되찾고 싶다는 마음으로 회사를 나온 지 1년차. 조직에서 시니어 에디터이자 중간 관리자 역할을 하다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 들었다. 퇴사와 독립을 감행한 순간 누구나 프리랜서계의 ‘신입’이 되기 마련.
‘회고’로 혼자 일하는 방식과 속도, 일상을 돌보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기록하다 보면 내가 실천하려는 바를 가로막는 게 단순히 ‘의지 부족’이 아니라는 것, 그 과정에 충분히 개선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이유들이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파악했다고 다 개선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그런 인간미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다)(…핑계가 아니라 진심이다) 적어도 회고를 하기 전보다 나라는 사람과 내 시간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회고하는 시간은 다음 주의, 다음 달의 나를 기르는 시간이기도 하다. 봄기운이 돌면서 집안의 화분들이 눈에 띄게 자라기 시작했다. 마른 잎을 떼어내고 물을 주고 달라진 해의 각도에 따라 위치를 조정해주다가 회고라는 게 결국 나라는 식물을 돌보는 일에 가깝구나 생각했다. 지금 상태가 어떤지 섬세하게 살피고, 마르거나 병든 이파리를 떼어내고, 다음 주에는 해를 더 잘 받는 위치에서 건강하게 지낼 수 있도록 위치를 조정해주는 일. 나라는 화분을 돌보면서 다가올 봄을 기다리고 싶은 계절이다. 할 일 말고 한 일을 기록하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땐 갸웃했는데, 요즘에는 그 말이 가리킨 게 무엇인지 손가락 끝이 보이는 기분이다.
🔰 p.s. ‘뿌아보 회고법’ 양식을 공유합니다.
‘기록’의 자리에 ‘일’ ‘운동’ ‘공부’ 등 여러분이 원하는 무엇이든 넣고 자유롭게 변형해서 사용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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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신지
‘내가 쓴 시간이 곧 나’라는 생각으로 걷고 쓰고 마시는 사람. 잡지 에디터로 일을 시작해 <PAPER> <AROUND> <대학내일> 등에 글을 쓰고 트렌드 미디어 ‘캐릿Careet’을 운영하다가 시간이 필요하다고 중얼거리며 회사 밖으로 나왔다. 이제야 하루가 내 것이 되었다는 안도 속에서 ‘살고 싶은 바로 그 시간’을 사는 연습을 하는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여행지에서 마시는 모닝 맥주. 지은 책으로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평일도 인생이니까》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게 취미》 등이 있다. 삶의 여백을 사랑하는 일에 대해 계속 쓰고 싶다.
연재를 진행합니다
<회고의 힘>을 주제로 김신지 작가의 에세이가 매월 1회 연재됩니다.(총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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