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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대 차고 건너가기 by 김민철아하 에세이 2022. 8. 22. 11:07
‘회사도 한 번 안 다녀본 사람이!’라는 말은 보통 누군가를 비하할 때 쓰는 말이다. 하지만 단 한 명에게 이 말은 찬사가 된다. 바로 <미생>의 윤태호 작가다. 회사도 한 번 안 다녀본 사람이 어떻게 이런 만화를 그릴 수 있는 걸까. 대기업의 생리를 이토록 성실하게, 이토록 사실적으로, 이토록 통찰력 있게, 이토록 설득력 있게, 동시에 이토록 재미있게(내가 아는 모든 칭찬을 여기에 다 쏟아 붓고 싶은 심정이다) 그려내기 위한 윤태호 작가의 노력, 몸의 일부분을 갈아 넣었음이 분명한 노력을 생각하면 나는 스크롤을 내리기도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이 죄송한 그 마음을 언제나 이겨버리긴 했지만.
<미생>을 볼 때마다 내 무릎을 꿇게 만드는 장면이 있다. 바로 오과장의 팀원이 요르단 사업에서 저지른 비리를 오과장과 팀원들이 밝혀낸 이후의 상황이다. 회사에서는 감사가 진행되고, 전 직원들을 대상으로 윤리교육이 급하게 이루어진다. 관련된 사람들의 사직이 이어지고, 약간의 동정론까지 조성된다. 그 상황에서 오과장의 영업3팀은 고요하다. 자신들의 성과를 영웅담으로 만들지도 않고,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떠벌려 시선을 끌지도 않고, 동정론에 정면으로 맞서지도 않는다. 그냥 시선을 일에 고정한다.
‘영업 3팀은 고요했다. 누구 하나 박 과장 일을 입에 담지 않고, 묵묵했다. 우리 팀이 이룬 성과는 기쁘기보다는 슬프고, 안타까운 결과를 남겨서일 것이다. 그래서 일로 피신한 것 같다. 그래서 일밖에 할 게 없는 거다.’ _윤태호 <미생> 중
팀의 빈자리를 뒤로하고 자신의 책상에 바짝 당겨 앉은 오 과장의 뒷모습 위로 ‘그래서 일밖에 할 게 없는 거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이 장면을 보면 나는 꼭 울게 된다. 웹툰 연재 당시에도 회사에서 스크롤을 내리다가 울었고, 몇 번이나 꺼내보면서 또 울었고, 책을 사서 읽으며 또 울고, 그리고 지금도 또 울고 있다. 이 감정을 너무 알아서, 이 감정을 힘들게 겪은 그때의 내가 어쩔 수 없이 자꾸 생각나서 나는 이 장면을 절대 그냥 넘어가지 못한다.
‘순탄한 회사 생활’은 아마도 신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개념일 것이다. 그런 건 없다. 아무리 순탄해 보이는 사람의 직장 생활도 조금만 들여다보면 수많은 상처와 찌그러진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누군가의 얼굴을 마주보는 것이 힘들어 점심을 거르고,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을 생각만으로도 숨이 차서 출근길에 오르지 못하는 순간이 찾아오곤 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여기서 나의 순탄하지 않았던 회사 생활의 순간을 낱낱이 밝히는 건 크게 의미가 없을 것 같다. 누군가를 그렇게 험담하느라 내 에너지를 쓰고 싶지도 않고. 그때 힘들었던 나를 세세하게 떠올리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경주마가 떠오르며 조금 안아주고 싶어진다.
내가 위험에 처했을 때 나는 꼭 경주마처럼 굴었다. 귀는 닫는다. 시선을 일에 고정한다. 맞다. 나도 일로 피신했다. 일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많은 일을 남기고 팀장과 팀 동료들이 모두 회사를 그만뒀을 때도 나는 일을 했다. 정치적인 말과 이기적인 판단이 오가는 전장 한가운데서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할 일만 했다. 빠르게 할 일을 하고 집으로 피신했다. 이상한 선배에게 매일 괴롭힘을 당할 때에도 나는 입을 닫았다. 혼자 점심을 먹고 자리로 돌아와 일을 했다. 오늘 이 회사에 온 이유는 오로지 이 일을 하기 위해서니까. 오로지 일을 보며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놀랍게도 매일 그날치 집중할 일거리가 있었다. 그렇게 일로 피신해서 무사히 건너온 시간이 내게도 있다.
그때 정치를 하던 사람들은, 나를 괴롭히던 사람들은, 팀원들의 뒤통수를 친 사람들은 내 눈앞에서 모두 사라지고 없다. 어디선가 또 잘 살아가고 있겠지만 결국 살아남은 건 내가 아닐까 한다. 결국 그 모든 시간 동안 일을 해낸 사람은 나였으니까.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일의 신뢰를 얻는 사람이 사람들로부터도 신뢰를 얻는다. 물론 그게 회사 생활의 전부가 아니라는 건 잘 안다. 정치도 있고, 인간관계도 있고, 치사한 공작도 있고, 끈끈한 형제애도 있고. 하지만 그건 내가 지닌 패가 아니다. 그럴수록 나는 더 내 손의 일을 꽉 쥔다. 여긴 회사니까. 우리는 이곳에 일을 하기 위해 모였으니까. 미생의 오 과장님이 일찍이 또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일을 해. 일을. 회사 나왔으면. 힘 빼지 말고. 왜 사람들이 질퍽이는 게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줄 알아? 게임을 하니까 빠지는 거야. 일하러 와서 게임이나 하고 있다간, 자네부터 게임에 빠질 거야.” _윤태호 <미생> 중
물론 이건 오 과장님과 나의 방식일 수도 있다. 누군가는 내 마음을 알아주는 동료에 기대어 어려운 시기를 건너기도 하고, 믿음직한 상사에게 기대어 어려움을 돌파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술에 기대기도 하고, 누군가는 이직을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정면승부를 하기도 한다. 그 모든 것이 방법이 될 수 있다. 다만 자신을 게임에 빠트리는 방식만은 권하고 싶지 않다. 정해진 룰은 없고, 심판도 없고, 심판이라 믿었던 사람이 알고 보니 저쪽 편이었고, 페어플레이 정신도 없고. 결국 이길 가능성은 희박하다. 당신을 지키기 위해 시작한 게임이라 생각하겠지만, 그 속에 들어가는 순간 당신도 결국 진흙탕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시선을 넓게, 더 높이, 더 멀리 둬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때론 시선을 좁게, 더 작게, 더 부분으로 가져가야 할 때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 하나만 두고 나머지를 다 소거해버리기. 어디에 시선을 고정시켜서 이 시기를 건너갈 것인가 결정하는 것.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나에게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 나는 그때 그게 일이었다. 여긴 회사니까.
글. 김민철
남자 이름이지만 엄연히 여자. 광고회사 TBWA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며 자주 책을 읽고, 때때로 글을 쓰고, 매번 떠나고 싶어 한다. 『모든 요일의 기록』 『모든 요일의 여행』 『하루의 취향』 『치즈: 치즈 맛이 나니까 치즈 맛이 난다고 했을 뿐인데』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 등을 썼다.
연재를 진행합니다
'회사에서 성장하기'를 주제로 김민철 작가의 에세이가 매월 1회 연재됩니다.(총 6회, 6월~12월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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