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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기둥 세우기 by 김민철아하 에세이 2022. 10. 28. 10:54
팀장이 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나의 오랜 팀장님과 업무 미팅을 가던 길에 내가 입을 열었다.
“김민철이 팀원이라서 정말 좋으셨겠어요.”
얘는 또 왜 이러나,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나 싶은 표정으로 나의 오랜 팀장님은 나를 바라보셨다. 해명이 필요하다.
“저는 참 말을 많이 했잖아요. 회의시간에도 언제나 제일 먼저 말하고, 남의 아이디어에 대해서도 제일 먼저 입장을 밝히고. 팀장이 되고 나니까 회의 시간에 꼭 허허벌판에 서 있는 기분이더라고요.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에 답이 있는지 하나도 모르겠고. 근데 있잖아요. 누가 말한디라도 해주면 그 허허벌판에 기준이 하나씩 서더라고요. 그 느낌 아시죠?”
“알지. 너무 잘 알지.”
“좋은 의견이면 쓰러지지 않을 튼튼한 기준이 되고, 말도 안 되는 의견이면 저쪽으로 가면 안 되겠구나 싶은 기준이 되고. 그런 시간을 겪다 보니, 제가 말이 되든 말든 계속 말한 게 팀장님에게 도움이 됐을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 팀원들을 말하게 만드는 게 생각보다 어렵네요.”
팀장이 되고 나서 첫 고민이 ‘말’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워낙 내가 물불 가리지 않고 아래 위 눈치도 보지 않고 말을 많이 하던 사람인지라 팀원들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회의시간에 모두 각자의 아이디어만 말하고 더 이상의 의견은 내지 않는 시간이 잦았다. 침묵이 가득한 회의실이라니. 그렇다고 내가 주구장창 떠들 수는 없었다. 팀장의 말이라고 다들 끄덕이고 있는 팀은 바란 적 없었다. 어쩌면 가장 피하고 싶은 팀은 바로 그런 팀이었다. 어떻게든 팀 사람들이 입을 열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들의 생각을 표현하게 만들어야 했다.
말. 말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 당연하게도 상대가 당신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을, 의견을, 불만을, 걱정을, 작은 팁이라도 말을 해야 알 수 있다. 팀장은 어쩌다가 회사를 오래 다닌 사람이지, 독심술을 익힌 사람이 아니다. 생각을 말이라는 그릇에 담는 것. 담아서 남들 앞에 보여주는 것. 회사를 다니는 사람에게는 주어진 일을 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고.
물론 처음부터 쉬울 리 없다. 말을 하기 위해선 상대의 말을 듣는 것과 동시에 이해를 하고, 부족한 부분이 없는지 살피고, 내 의견까지 정리해야 한다. 그 모든 일이 한꺼번에 머릿속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 와중에 완벽한 문장으로, 완벽한 논리로, 정답 같은 의견을 계속 말한다고? 그건 김연아의 트리플악셀 경지다.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그런 이상향에 대한 강박은 내려놓고 불완전해도 좋으니 자신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입 밖으로 꺼내놓는 것을 연습해야 한다. 내가 연습한 말은 이거였다. “근데….”
“근데…”라는 말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와 꽂혔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각종 걱정이 생각의 자리를 채운다. 하지만 이미 첫 마디는 엎질러졌다. 다음 말을 이어가야 한다. “근데… 제 생각엔… 그쪽 방향으로 가면 원래 과제와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근거도 대안도 빈약한 말 하나. 하지만 그 말을 내뱉는 순간 회의실 안에는 나만의 손바닥만 한 영토가 생겼다. 반대 의견이, 비판이, 동의하는 말들이 더해졌지만, 어쨌거나 회의가 끝날 때까지 거기, 아직, 내 말이 있었다. 아무에게도 안 보였지만 신입사원인 내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회의실 안에서 한 사람의 말은 한 사람의 영토가 된다. 일견 지위에 따라 영토가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 쉽다. 하지만 회의실 안 영토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회의시간은 말로 자신의 영토를 한 뼘씩 늘려나가는 시간이다. 총도 칼도 없다. 자료와 생각과 의견, 이것을 재료로 삼아서 말을 해야만 한다. 언제부터? 지금부터. 시키는 일만 고분고분 잘해도 괜찮은 시간은 의외로 짧고, 어느 순간 사람들이 당신의 입을 바라보는 시기가 찾아온다. 자신이 말을 해야 하는 시간이 왔을 때 아무런 준비 없이 그 장에 뛰어들 순 없다. 연습이 필요하다. 한 번도 안 넘어진 김연아를 상상할 수 있는가? 넘어지는 것도 자주 해봐야 선수가 된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팀원들을 다그칠 수는 없었다. 팀원들이 기꺼이 연습하게 만들기 위해선 크고 푹신한 매트를 준비해야 했다. 어떤 말을 던져도 다치지 않는 안전한 매트. 그러니까 어떤 말을 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확신. 나는 귀를 아주 크게 만들기로 했다. 품을 아주 넓게 벌리기로 했다. 그리고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묻고, 들었다. 반영하고, 다시 물었다. 팀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앞에 두고, 계속 물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이런이런 문제가 있을까? 괜찮을 것 같아? 근데 나는 이런이런 게 걱정이 되는데 그건 또 어때? 아! 좋은 아이디어 생각났다. 말하다 보니 또 이상하네. 아니야? 괜찮아?
그렇게 시간이 한참 지난 어느 날 오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회의를 했다. 결정할 게 많은 회의였다. 반드시 이 회의에서 모든 것을 정리하겠다, 라는 마음가짐으로 모두 회의실에 들어왔다. 이제까지 우리가 낸 아이디어를 쭉 펼쳐놓고, 말을 시작했다. 나에게서 시작된 말은 계속 이어졌다. 긴 회의였다. 다른 팀원으로 또 다른 팀원으로. 모두가 말했고, 모두가 들었고, 모든 것이 반영되었다. 그러다 더 이상 어떤 말도 더 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찾아왔다. “이 정도로 회의 끝마칠까?”라고 말했더니 팀 사람들이 “네”라고 대답하면서 자신들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모두 상기된 얼굴이었다.
회의실을 나오며 카피라이터가 말했다.
“오늘 회의, 진짜 진짜 좋았어요.”
점심을 먹으러 가며 아트디렉터가 말했다.
“아까 회의, 진짜 좋았어요.”
점심을 먹고 나오며 부장 아트디렉터가 말했다.
“CD님, 아까 회의 진짜 괜찮았던 거 같아요.”
가슴을 쓸어내리며 나는 말했다.
“아, 이거면 다 된 거 같아.”
그렇게 마침내 나는 내가 좋아하는 팀에서 일하게 되었다.
글. 김민철
『내 일로 건너가는 법』 저자. 주중에는 광고회사 TBWA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고, 주말에는 글을 쓰며 작가로 활동 중이다. 18년간 SK텔레콤, 네이버, LG전자, 일룸, SK에코플랜트 등의 광고 캠페인을 담당했으며 『모든 요일의 기록』, 『모든 요일의 여행』, 『하루의 취향』, 『치즈: 치즈 맛이 나니까 치즈 맛이 난다고 했을 뿐인데』,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 등을 썼다.
연재를 진행합니다
'회사에서 성장하기'를 주제로 김민철 작가의 에세이가 매월 1회 연재됩니다.(총 6회, ~23년 1월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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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팀장으로 이직했습니다
2화 일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는 법
3화 안대차고 건너가기
4화 6시 퇴근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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