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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는 법 by 김민철아하 에세이 2022. 7. 19. 19:16
일이라는 놈은 본디 성격이 고약하고 힘이 무지막지하게 센 법이라 잠깐만 방심을 해도 일상을 확 잡아채다가 무너뜨려버린다. 가지고 있는 카드도 어찌나 많은지. ‘지금 당장’ ‘반드시 내일까지’ ‘무조건 이 일부터’라는 카드를 달고 우리 앞에 나타나서 자기부터 챙기라고 성화다. 그렇게 일의 말을 다 들어주다가는 우리 몸이 남아나지 않는 법. 광고회사에서 십 수 년 간 일을 하다 보니,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곳에서 일에게 짓밟히지 않고 살아남으려고 애쓰다 보니, 이제는 일의 힘을 빼앗는 법을 조금 알 것도 같다. 남다른 비법은 아니지만, 그럼 한번 소개해볼까.
‘일의 인수분해’. 전혀 어려운 말이 아니다. 그냥 일을 분해하라는 것이다. 마치 낙지 탕탕이를 만든다는 기분으로 잘게 쪼개서 일의 힘을 분산해보라. ‘TV광고 제작’이라는 일을 예로 들어볼까? TV광고를 제작하려면 촬영을 해야 하고, 촬영을 하려면 감독을 만나야 하고, 감독을 만나려면 TV광고를 위한 아이디어가 정리되어야 하고, 아이디어를 정리하려면 아이디어 회의를 해야 한다. TV광고 제작이라는 거대한 일을 잘게 쪼개는 것이다(물론 실제로는 훨씬 더 잘게 쪼갠다). 최종 목표만 보면 언제 시간 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 부담감만 커지지만 잘게, 더 잘게, 그러니까 이 정도는 내가 할 수 있겠다, 라는 마음이 들 때까지 쪼갠다. 편식하는 아이에게도 잘게 다져 재료를 감춰 먹이는 것처럼, 일 앞에서 부담스러운 마음이 드는 사람에게도 이 방법은 효과적이다. 당신은 이미 하고 있는 방법이라고?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한다. 말하지 않았는가. 남다른 비법이 아니라고. 당신도 알다시피 그 어떤 거대한 일도 이 방법 앞에서는 기를 못 편다.
일을 잘게 쪼개고 난 후엔 추가 작업이 필요하다. 바로 ‘역산’. 우리 팀은 새로운 일이 들어오면 다 같이 모여 앉아서 달력을 보며 스케줄을 짠다. 역산의 방법으로. 이미 앞 단락에서 설명한 방식을 보고 눈치를 챈 분들도 있겠지만, 모든 스케줄은 먼 곳에서 가까이 오는 방식으로 짜야 한다. 왜? 당장 일을 시작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첫 일정부터 살짝 넉넉하게 잡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가까운 일정부터 짜나가다 보면 뒷 일정이 모자라는 사단이 난다. 그러니 반드시 역산해야 한다. 먼 일정부터 느슨하게 짜며 앞으로 오다보면 지금 당장 일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의무의 문제로 돌입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스케줄을 짠다. TV광고 온에어 날짜를 세워두고, 온에어를 하려면 적어도 일주일 전에는 광고주 시사를 해야 하고, 광고주 시사를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 전날 녹음을 해야 하고, 녹음을 하려면 편집이 그 전에 끝나야 하고, 편집을 그때까지 하려면 적어도 일주일 전에는 촬영일을 잡아야 하고… 이런 식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역산하다 보면 당장 우리가 아이디어에 쓸 수 있는 시간이 나온다. 그럼 그 시간을 다시 잘게 쪼개서 세 번째 아이디어 회의를 잡고, 거기에서 역산해서 두 번째 아이디어 회의를 잡고, 또 거기서 역산해서 우리의 첫 아이디어 회의를 잡는 것이다.
물론 스케줄을 짤 때 팀원들은 나 때문에 곤란한 상황을 많이 맞이한다. 왜? 유난히 스케줄을 짤 때 나는 비관주의자가 되기 때문이다. 내 머릿속 비관주의자가 나에게 말한다. 분명 중간에 변수가 생길 거야. 뒤에 시간을 많이 확보해놓지 않는다면 나중에 곤란해질지도 몰라. 지금, 최대한 바짝 당겨서 스케줄을 잡아야 해. 이런 생각들이 계속되다 보면 결국 입에서는 이런 말이 튀어나가는 것이다.
“우리 미루지 말고, 내일 회의 한번 해볼까? 가볍게.”
물론 팀원 입장에서는 ‘가벼운 회의’라는 말이 결코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늘 저런 말을 해서 팀원들이 절레절레 고개를 젓게 만든다. 그런 일이 매번 반복되다 보니 최근에는 이런 말도 들었다.
“팀장님 MBTI는 ASAP잖아요.”
“아 맞네!”
ASAP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팀장이라, 혼자서 급하게 스케줄을 짜서 팀원들에게 통보할 수도 있겠지만 되도록 팀원들과 다 같이 하는 건, 이쪽 장점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첫째, 혹시라도 빼먹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모두가 크로스체크 중이니까. 둘째, 스케줄 중간에 다른 프로젝트의 스케줄과 개인 사정이 있다면 그 시간도 고려해가며 일정을 잡을 수 있다. 셋째, 이 스케줄에 대한 책임감과 자율성을 나눠가질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함께 약속한 일정을 지킨다는 절대 명제를 두고 나머지 시간은 각자 알아서 구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큰일을 인수분해하고, 역산해서 스케줄을 촘촘하게 짜는 것에 공을 많이 들이는 까닭은, 다시 말하지만 일의 힘을 빼기 위해서다. 일이 높은 파도를 일으켜 우리 일상을 집어 삼키는 꼴을 막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꼭 내가 팀장이라서만은 아니다. 나는 누구보다 나의 일상의 정원을 잘 가꾸고 싶은 사람이다. 퇴근 후에 대단한 일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TV 앞에 멍하니 앉아서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허비하더라도 내 마음대로 써버릴 수 있는 시간이 하루에 꼭 있어야 숨을 쉴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작업은 팀을 위한 작업이기도 하지만 결국 나를 위한 작업이기도 하다.
아마 나의 비법이 쓸모가 없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각자가 일을 해가면서 자신만의 비법을 완성한 경우도 많을 것이다. 어떤 방법을 쓰든 상관없다. 이 모든 비법을 통해 달성해야 하는 목표만 기억하면 된다. 일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는 것.
내 일의 주도권은 반드시 내가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우리에겐 일보다 더 중요한 ( )이 있으니까. 괄호 안은 각자 마음껏 채워도 좋다.
글. 김민철
남자 이름이지만 엄연히 여자. 광고회사 TBWA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며 자주 책을 읽고, 때때로 글을 쓰고, 매번 떠나고 싶어 한다. 『모든 요일의 기록』 『모든 요일의 여행』 『하루의 취향』 『치즈: 치즈 맛이 나니까 치즈 맛이 난다고 했을 뿐인데』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 등을 썼다.
연재를 진행합니다
'회사에서 성장하기'를 주제로 김민철 작가의 에세이가 매월 1회 연재됩니다.(총 6회, 6월~12월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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