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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과 에베레스트 by 도대체아하 에세이 2022. 1. 7. 14:39
어쩐지 자꾸만 헷갈리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분명히 아는 단어인데 입에서 나올 때는 음절의 순서가 뒤섞이는 단어들입니다. ‘에베레스트산? 아닌가, 에레베스트산인가?’, ‘스튜디어스? 아니 참 스튜어디스인가?’ 하는 식으로 말이죠. 한번 헷갈리기 시작하면 이후로는 더 자꾸 헷갈리기 쉽습니다. 세간에는 ‘노인코래방’과 ‘알르레기’, ‘멸린말치’와 ‘야치참채’ 같은 단어도 떠돌고 있죠. 이런 것을 보면 제법 흔한 현상인 것도 같습니다.
학창 시절에 국사를 배우면서 저에게는 그런 단어가 하나 더 생겼습니다. 바로 ‘근초고왕’입니다. 백제의 제13대 왕이자 강력한 고대 국가의 기반을 마련하며 백제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는 근초고왕. 중요해서 시험 문제로 나올 확률도 높은 인물이었죠. 그래서 ‘근초고왕’ 네 글자를 기억해두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맙소사, 그때부터 근초고왕은 학창 시절 내내 저의 걱정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쩐지 ‘근초고왕’인지 ‘근고초왕’인지 헷갈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관식 문제로 나온다면 분명히 ‘근고초왕’이라 잘못 쓸 것만 같았습니다. 아는 문제인데 그런 식으로 틀린다면 너무 억울해서 땅을 치면서 괴로워할 것이 분명했죠. 절대로 틀려서는 안 되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근초고 근초고 근초고……’ 하고 단단히 암기했지만 어느 순간 다시 또 ‘잠깐…… 혹시 근고초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였죠. 환장할 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근초고왕이 시험 범위인 국사 시험이 다가오면 제 머릿속은 온통 근초고왕으로 꽉 찼습니다. 행여나 답안을 잘못 쓰는 일이 없도록, 그래서 억울하게 틀리는 일이 없도록 시험지를 받는 순간까지 머릿속으로 ‘근초고 근초고 근초고……’를 읊다가, 시험지에 제 이름보다 먼저 ‘근초고’라고 얼른 적어놓았던 기억도 납니다.
그러나 제 기억이 맞는다면, 근초고왕은 결국 주관식 문제로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음 중 근초고왕의 업적끼리 짝지은 것을 고르시오.’ 같은 객관식 문제로만 나온 것 같아요. 정말이지 맥이 탁 풀리는 일이었죠.
이렇게 시험에 연연했던 것을 보며 제가 모범생이었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딱히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아니었거든요. 사실 근초고왕 말고 다른 왕은 누구누구가 있었는지 잘 알지도 못합니다. 그저 제가 아는 몇 안 되는 문제 중 하나를 틀릴까 봐 전전긍긍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초조해하며 걱정할 시간에 다른 시험 범위를 공부했다면 오히려 시험을 더 잘 보았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더 이상 국사 시험을 볼 일도, 백제에 대해 대화할 일도 딱히 없는 어른이 된 지금도 가끔 그 일이 떠오릅니다. 염려하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봐 걱정하고 있다 보면, 문득 ‘잠깐, 혹시 지금 내가 ‘근초고왕’ 같은 걱정으로 끙끙 앓는 건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죠. 고백하건대 저는 그런 걱정이 매우 많은 사람입니다. 작년 한 해만 해도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란 생각에 사로잡혀 그 일을 고민하는 데 많은 시간과 마음을 쓰고 말았습니다. 한번 떠오른 걱정을 잠재우는 것은 어찌나 어려운 일인지요.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 애써도 자꾸만 두둥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걱정을 대체 어떡해야 하는 걸까요? 마인드 컨트롤에 대한 이런저런 글들을 읽어 보아도 마음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또다시 걱정이 밀려올 때면 ‘이것은 근초고왕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근초고왕을 근고초왕으로 쓸까봐 걱정되는 마음을 내려놓고, 그 시간에 다른 것에 눈을 돌리자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한참 더 살아서 백발의 노인이 된 어느 날, 임종을 앞두고 가족과 친구들 앞에서 지난 삶을 떠올리며 “근초고왕 같은 걱정을 하느라 전전긍긍하던 세월이었구나…….” 말하는 제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합니다. 허탈하면서도 쓴웃음 나는 결말일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근초고왕 같은 걱정거리가 한두 개씩은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더 많을 수도 있겠고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해두느라, 지금 할 수 있는 다른 중요한 일들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아, 그리고 아주 뒤늦게 알게 된 팁이지만, ‘근초고왕’은 ‘초고추장’으로 외우면 헷갈리지 않을 수 있다고 합니다. 저도 진작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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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도대체
한량 기질 아버지와 부지런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두 분의 중간이 되지 못하고 ‘게으른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한량’이 되었다. 개 ‘태수’, 고양이 ‘꼬맹이’ ‘장군이’의 반려인간으로,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어쩐지 웃기는 점을 발견해내는’ 특기를 살려 작은 웃음에 집중하는 글과 그림을 생산하고 있다.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 『어차피 연애는 남의 일』 『그럴수록 산책』 등을 출간했다.
지은 책 중에서 추천해요!
『그럴수록 산책』: 걷다 보면 모레쯤의 나는 괜찮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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