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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매는 날들 by 도대체
    아하 에세이 2021. 11. 26. 15:06

     

    어느 날 친구가 저에게 적성검사를 받지 않겠냐고 물었습니다. 적성검사라니, 참 오랜만에 듣는 단어였습니다. ‘이 나이에 웬 적성검사여?’ 싶었는데, 친구 말로는 주위의 학부형 여럿이 검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초등학생 자녀들이 적성검사를 받고 결과가 나오는 과정을 지켜보다가 나도 한번 받아볼까?’ 하게 되는 거라네요. 친구 역시 검사를 받으려고 마음먹은 참이라고요. 중년이 되어서도 자신의 적성이 궁금하고, 지금보다 더 잘 맞는 일이 있지는 않은지 궁금한 이들이 많은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뜬금없는 고백이지만, 저는 학창시절에 수업을 제대로 듣는 것이 몹시 어려운 학생이었습니다. 그건 저의 잘못이기도 하고 잘못이 아니기도 했는데, 아무리 수업을 열심히 듣겠다고 마음먹은 시간이어도 불가항력처럼 이내 딴생각에 빠지곤 했기 때문입니다. 딴생각은 얼마나 달콤하고 재미있는지, 교실 앞에서 열정적으로 강의하는 선생님을 두고도, 그 좁은 책걸상에 가만히 앉아 있는 상태에서도,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 보면 한 시간 수업쯤이야 금방 지나갔습니다. 그러니 학년이 올라갈수록 성적은 떨어졌는데, 오죽하면 고등학교 때 선생님 한 분은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도 있답니다.

     

    희한하지. 너는 수업은 열심히 듣는 것 같은데 성적은 안 나온단 말이야.”

     

    수업을 열심히 듣겠다고 생각은 한저의 마음을 알아주셔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저는 허리를 펴고 칠판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머릿속으로는 딴생각을 하는 중이었을 뿐입니다.

     

     

    ⓒHello I'm Nik

     

    어른이 되어서도 저는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는 제 주위를 빼앗는 재미난 것들이 너무 많았고, 더 이상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되게 된 저는 마음 놓고 딴생각을 하며 지냈습니다. 그리고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떠드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것을 재미있게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는 한편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불행히도 저의 남자친구였던 한 사람은 후자였는데, 드물게 사색과 명상, 고요한 것을 좋아하던 그는(대체 그런 사람이 어쩌다 저와 사귀게 되었을까요!) 제가 세상 온갖 것에 대해 자꾸만 떠드는 것이 부담되었던 모양이었습니다. 어느 날 둘이 버스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시내를 지나가고 있었는데요. 그날도 저는 창밖으로 보이는 어떤 가게의 간판이 웃기다고 생각해서 떠드는 참이었거든요. 그때 그가 조심스레 말하더라고요.

     

    대체 씨는 이런 생각을 자주 하잖아요?

    이렇게 평소에 생각하는 것들을 따로 얘기할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겠네요.”

     

    딴생각을 자주 하는 것을 존중은 하겠지만 일일이 자기에게 말하는 것은 힘들다는 말을 돌려 말한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산만한 학생, 산만한 직장인, 산만한 프리랜서 등 직업과 장소만 바뀌어가며 산만한 사람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짐작하셨겠지만 저의 이런 면은 생계에 해가 되면 되었지 득이 될 일은 없었습니다. 일 하나를 마치기까지 제 주의를 빼앗는 것이 많았으니까요.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일하는 와중에도 수시로 떠오르는 딴생각들을 물리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살다 보니 어느 순간 저의 이런 면이 도움이 되는 날이 찾아왔습니다. 만화를 연재하면서부터입니다. 지금 저는 2개의 주간 연재를 하고 있는데, 하나는 네이버 동물공감판에 연재 중인 <태수는 큰형님>이란 만화이고, 또 하나는 경향신문에 연재하는 토요툰입니다. 두 만화 모두 820컷 안쪽의 짧은 분량이고, 매주 다른 에피소드로 이루어지죠. 살면서 겪게 되는 소소한 일들, 이런저런 공상들을 담고 있습니다. 두 만화를 그리면서, 특히 토요툰의 소재를 얻는 데 평소에 하는 딴생각들이 큰 도움이 됩니다. 언젠가 전 남자친구가 말했던, ‘이렇게 평소에 생각하는 것들을 따로 얘기할 수 있는 곳이 생긴 기분입니다. 저의 딴생각들을 혼자 갖지 않고 만화로 그려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고, 풍족하진 않지만 원고료도 벌고 있으니 이런 날이 올 줄 몰랐습니다. 저는 그대로인데, 살다가 어찌어찌 하는 일이 달라지자 그런 면이 도움이 된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닙니다. 예전에도 저는 일자리를 옮기면서 하루아침에 이런 일도 못하는 모자란 사람에서 일 잘하는 사람이 된 경험이 있습니다. 저는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은 사람이었는데, 단지 맡은 일의 종류가 달라지면서 겪은 일이었습니다. 꼼꼼한 돈 계산과 사람 관리가 필요한 일에서 그렇지 않은 일로 바뀌면서요. 그 경험 후로는 제가 길을 헤매는 듯 여겨질 때 깊고 깊은 자괴감에 풍덩 빠지기 전에 혹시 내가 지금 나와는 맞지 않는 곳에 있어서 이렇게 헤매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는 마음가짐을 얻은 것도 같습니다.

     

    어쩌면 삶은, 평생 자기에게 맞는 것을 찾아 헤매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몸에 꼭 맞는 옷과 신발, 편안하게 베고 잘 수 있는 베개부터(저는 아직도 100% 마음에 드는 베개를 찾지 못했답니다), 하는 일과 만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헤맨 대가로, 또는 순전히 운이 좋아 얻어걸리듯 나에게 꼭 맞는 것들을 만나게 되는 날이 오기도 하는 것 같아요.

     

    저는 40대가 되어서야 저의 산만함이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일을 만나서 하고 있지만, 역시나 같은 맥락에서, 저는 그대로인데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의 요구가 달라지면서 더는 이런 식의 만화를 그리게 될 수 없는 날이 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것은 제가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그런 날이 되도록 늦게 찾아오길 바라면서 일할 수 있을 때 착실하게 일할 수밖에요. 그런 한편 산만한 사람답게, 혹시 또 나에게 더 잘 맞는 일이 있는데 아직 모르는 것은 아닌지 싶어 다른 쪽으로도 틈틈이 탐색 중입니다. 어른들의 적성검사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결론까지 나왔네요. 모쪼록 이해해주세요. 워낙 산만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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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하레터에서 도대체 작가의 <나로 사느라 고생이 많아요> 연재를 시작합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분명한 행복을 찾아내는 도대체 작가님의 이야기는 매월 한 번씩 찾아올게요.(~21.1월)

     

    글. 도대체

    한량 기질 아버지와 부지런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두 분의 중간이 되지 못하고 ‘게으른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한량’이 되었다. 개 ‘태수’, 고양이 ‘꼬맹이’ ‘장군이’의 반려인간으로,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어쩐지 웃기는 점을 발견해내는’ 특기를 살려 작은 웃음에 집중하는 글과 그림을 생산하고 있다.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 『어차피 연애는 남의 일』 『그럴수록 산책』 등을 출간했다.

     

    지은 책 중에서 추천해요!

    『그럴수록 산책』: 걷다 보면 모레쯤의 나는 괜찮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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