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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대로 살란다 by 도대체
    아하 에세이 2021. 10. 28. 15:42

    ⓒMaria Oswalt

     

    초등학생 때 만난 어느 담임선생님은 종종 갱지를 나눠 주고 “3등분으로 접으세요라고 주문했습니다. 세 구역으로 나뉜 종이에 선생님을 따라 필기를 하기도 하고, 간단한 쪽지 시험을 보기도 했죠. 저는 그 시간을 은근히 기다리다가, 선생님이 지시하면 마음속으로 즐거워했답니다. 종이를 자로 재지 않고도 3등분으로 접는 것엔 자신 있었거든요. 어쩐지 그것이 아주 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 종이를 후다닥 잽싸게 접은 다음 짝꿍의 종이도 접어주고, 앞뒤에 앉은 친구들이 내미는 종이도 접어주었습니다. 아직까지도 그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제가 얼마나 뿌듯했는지 짐작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학년이 점점 올라가면서 종이를 3등분으로 접을 일은 점점 줄었습니다. 사회로 나오니 그럴 일이 전혀 없다시피 했고요. 그래서 더는 그 재능(?)을 뽐낼 일이 없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또 다른 저의 재능들을 나열하자면, 저는 모기 소리도 잘 듣습니다. 깊은 잠을 자다가도 !’ 하는 모기의 날갯짓 소리를 놓치지 않고 잠에서 깨고 맙니다. 그러나 소리를 잘 듣는다고 모기를 잘 잡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가을 모기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 같은 때 수시로 잠에서 깨느라 피곤해지기만 할 뿐 딱히 득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저는 휘파람도 제법 잘 붑니다. 부는 법을 따로 배우지 않았지만 어쩐지 처음부터 잘 불 수 있더라고요. 노래 한 곡쯤은 거뜬히 완창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남들이 있을 때 휘파람을 분 적은 손에 꼽습니다. 가끔 혼자 있을 때 심심하거나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를 따라하고 싶을 때 한 번씩 불러볼 뿐입니다.

     

    냄새를 잘 맡아서 그날그날 달라지는 수돗물 냄새를 구별할 수 있는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입니다. 그러나 이를 닦거나 세수를 하면서 오늘은 염소가 많이 들어갔나보구나생각하게 되는 것 외에는 딱히 쓰일 일이 없습니다. , 스타트렉에 나온다는(정작 저는 아직 보지 않았지만), 손가락을 두 개씩 붙여 인사하는 동작도 따라할 수 있지만 쓸 일이 없습니다. 주위에 스타트렉마니아라도 있으면 만날 때마다 손을 들어 인사할 수 있을 텐데요.

     

    출처: 스타트렉

     

    이런저런 재능을 떠올려보았지만, 현재 제 삶에 큰 도움이 되거나 어딘가에 자신 있게 내밀 만한 것들은 아닌 듯합니다. 애석한 일입니다. 그래서 가끔은 언젠가 저의 재능으로 큰일을 하게 되는 상상을 하기도 합니다. 어느 날 외계인이 지구를 찾아와서는, “지금부터 1분 안에 이 종이를 정확히 3등분으로 접으면 지구를 침략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죠 그러면 저는 지구를 대표해서 30초 안에 그 일을 해낸 다음 지구를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산책길에 주위에 아무도 없는 줄 알고 휘파람으로 노래 한 곡을 불렀는데, 때마침 지나가던 테러범이 우연히 그 소리를 듣고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떠올리며 죄를 뉘우친 다음 눈물을 흘리며 범행을 포기하고 경찰서에 자수를 하러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차원이 틀어져서 또 다른 세계로 떨어졌더니 그곳에서는 모기 소리를 잘 듣는 사람이 꼭 필요한 상황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당연히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상상의 끝은 언제나 허무합니다. 자잘한 재능이 이렇게 많은데(!) 발휘할 수 있는 큰일이 없다니 애석한 일입니다. 하다못해 좀 있어 보이는 재능이었다면 SNS 프로필에 한 줄 적을 수도 있었을 텐데, ‘수돗물 냄새를 잘 구별함같은 것을 적기에는 뭔가 많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내가 가진 재능들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대단한 재능은 아닌 듯하지만, 아무려면 어떻단 말인가!’ 대단한 일을 하려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대단한 일을 못한다고 큰일 난 것도 아닌데요. 그런 생각을 하면 피식 웃음이 나옵니다. 나는 그냥 나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아가면 될 일입니다. 그래서 두 번 접어서 수납해도 될 수건을 굳이 3등분으로 접어서 수납장에 넣으면서, ‘아직 실력이 녹슬지 않았군!’이란 생각에 뿌듯해져 잔뜩 고양된 기분으로 휘파람을 붑니다.

     

    이 글을 읽으며 눈치채셨겠지만, 저의 마지막 재능은 쓸데없는 공상과 자화자찬을 잘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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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하레터에서 도대체 작가의 <나로 사느라 고생이 많아요> 연재를 시작합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분명한 행복을 찾아내는 도대체 작가님의 이야기는 7월부터 12월까지, 매월 한 번씩 찾아올게요.

     

    글. 도대체

    한량 기질 아버지와 부지런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두 분의 중간이 되지 못하고 ‘게으른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한량’이 되었다. 개 ‘태수’, 고양이 ‘꼬맹이’ ‘장군이’의 반려인간으로,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어쩐지 웃기는 점을 발견해내는’ 특기를 살려 작은 웃음에 집중하는 글과 그림을 생산하고 있다.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 『어차피 연애는 남의 일』 『그럴수록 산책』 등을 출간했다.

     

    지은 책 중에서 추천해요!

    『그럴수록 산책』: 걷다 보면 모레쯤의 나는 괜찮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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