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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으로 이직했습니다 by 김민철아하 에세이 2022. 6. 23. 17:24
사원, 대리, 차장, 부장까지는 진급이었다. 진급할 때마다 새 명함이 나왔고, 책상 앞 이름표가 바뀌었다. 일주일 정도 곳곳에서 축하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솔직히 그렇게 축하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같은 자리에 앉아서 같은 일을 하는걸. 물론 조금씩 말의 무게가 달라지고, 처리해야 하는 일의 범위가 달라졌지만 그건 진급의 문제라기보다는 시간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팀장으로 발령받았다. 내가 팀장 능력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도 알지 못한 채로 팀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팀장이 되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생각한 적이 있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팀원들은 한 번쯤 그 생각을 거쳐간다. 매일 눈앞에 보이는 팀장을 보며, 팀장이 하는 일을 보며, 내 능력을 가늠해보는 것이다. 나는 저 정도의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인가. 저 정도의 일을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인가. 나는 좋은 팀장이 될 수 있을까. 어떤 순간에는 내 잠재력이 팀장을 뛰어넘을 것만 같고, 어떤 순간에는 간이 콩알만 해지며 숨고만 싶어진다. 팀장은 무슨 팀장이야. 무엇보다 나는 지금까지 내내 ‘곧 회사 그만둘 거야’라는 입에 달고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팀장이라고?
곰곰이 생각했다. 언제 회사를 그만둬야 할까 늘 생각했는데, 팀장이 되어버렸으니 그 생각을 ‘아니면 그만두면 되지 뭐’라는 담대함으로 바꿔야 했다. 어차피 그만둘 생각이었으니, 용기를 가지고 팀장 역할을 해보는 거지, 뭐. 이번 기회에 확실히 판가름이 날 터였다. 다 덤벼! 라는 심정으로 두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불끈 쥐고 팀장 역할에 임했지만 곧바로 당혹스러움이 찾아왔다. 왜? 팀장의 역할이 내 적성에 잘 맞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 당혹스러워하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사실도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모두가 그럴 줄 알았다,라는 반응이었다. 뭐야? 나만 몰랐던 거야?
나라고 아예 모를 리가 없었다. 나는 나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사람이니까. 카피라이터로 12년을 살았지만 나는 카피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이디어 내는 걸 즐거워하는 류의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카피를 쓰고 아이디어를 내는 건 카피라이터의 주 업무. 좋아하는 일이 아니었지만 동시에 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취미가 아니라 일이니까. 잘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끝없이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에겐들 아이디어 내는 일이 쉽겠냐만은 유독 그 일을 즐기는 동료들이 많았다. 그런 동료들이 부러웠지만 부럽다고 해서 좋아하는 능력까지 가질 수는 없었다. 그건 내 영역이 아니었다.
대신 내 영역이 있었다. 좋아하고, 쉽게 잘 할 수 있는 일. 바로 정리였다. 오랫동안 나의 팀장님을 보며 감탄했다. 이렇게나 산발적인 아이디어가 회의실에 잔뜩 쌓여있고, 이렇게나 각기 다른 생각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를 높이는데, 팀장님은 매번 놀랍게 정리했다. 마치 정해진 뱃길이 있는 것처럼 팀장님의 말이 회의실을 갈랐다. 팀장님의 말이 지나간 자리에는 우리들의 산발적인 아이디어들이 그물에 걸려 펄떡이고 있었다. 나는 매번 탄복하며 배웠다. 그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어느새 나에게도 보였다. 아이디어들 사이로 난 길이 미세하게. 그 길이 종종 결정적인 방향이 되었다. 회의실 안에서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나의 정리력은 조금씩 더 강해져갔다.
나의 정리력은 회의실 안에서만 유용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 아이디어를 정리해서 광고주 앞에서 발표를 해야 할 때도 유용했다. 그땐 정리력만큼이나 강력한 나의 책임감이 힘을 발휘했다. 오랫동안 우리 팀 사람들이 노력해서 완성한 아이디어, 그 아이디어를 잘 설명할 책임이 나에게 있었다.
정리력과 책임감. 나의 특성이 나만의 강점으로 변모하는 순간이 찾아왔으니, 그것이 바로 팀장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때쯤부터였다. 나는 더 이상 퇴사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마침내 내게 딱 맞는 직업으로 이직을 했으니까. 팀장으로 이직. 진급이 아니라 이직. 해야 하는 일도, 발휘해야 하는 능력도, 신경 써야 할 것도, 기대하는 역할도, 모두 다 달라졌다. 물론 나의 마음가짐도 달라졌다. 이것이 이직이 아니라면 무엇이 이직이겠는가. 내가 속한 회사는 그대로였지만 나는 전혀 다른 회사를 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 회사는 그전의 회사보다 나에게 훨씬 잘 맞았다.
“어쩌죠?”
“왜?”
“저 언제 회사 그만둘 수 있을까요? 팀장 일이 잘 맞다니. 못 그만두면 어쩌죠?”
나의 퇴사 노래를 평생 들어온 나의 오랜 팀장님은 빙긋 웃었다. 그리고 건배를 하시며 한 마디하셨다.
“Life itself will let you know.(인생이 알려줄 거야.)”
너무 애쓰지 말고, 재미가 있으면 재미있는 대로 강물에 몸을 맡기는 거야. 그게 아니라면 그건 그때 또 생각하면 되는 거지. 그러다 어떤 강둑에 도착하게 되면 그때 또 거기서 답을 찾아보면 되는 거지. 지금 모든 답을 다 알려고 애쓰지 마. 인생이 알려줄 거야.
물론 그 이후의 인생이 알려준 것은 팀장 역할이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다는 사실이었다. 팀장이라 괴로워하며 자꾸 새벽에 깨고, 팀장이라 혼자 고민하고, 팀장이라 바늘 끝에 선 것처럼 무서운 시간들이 자주 찾아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이직을 후회하진 않았다. 어렵더라도, 꼭 이겨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면 그건 어쩌면 내가 이 일을 더 잘해보고 싶다는 욕심의 증거라 볼 수 있으니까. 이직을 하지 않았다면 이 욕심이 내게 이토록 있는지도 몰랐을 테니까. 그럼 이제 좋은 팀장이 되기 위한 노력, 시작해볼까.
글. 김민철
남자 이름이지만 엄연히 여자. 광고회사 TBWA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며 자주 책을 읽고, 때때로 글을 쓰고, 매번 떠나고 싶어 한다. 『모든 요일의 기록』 『모든 요일의 여행』 『하루의 취향』 『치즈: 치즈 맛이 나니까 치즈 맛이 난다고 했을 뿐인데』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 등을 썼다.
연재를 진행합니다
'회사에서 성장하기'를 주제로 김민철 작가의 에세이가 매월 1회 연재됩니다.(총 6회, 6월~12월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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