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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분야에서 존재감을 가진다는 것 by. 이진선아하 에세이 2022. 7. 11. 14:17
월급 50만 원짜리 경리로 시작한 첫 커리어
사회 부적응자. 20대 내내 나는 나 자신을 그렇게 여겼다.
첫 회사는 부부가 경영하는 자판기 회사였다. 갓 20살이 되자마자 직원 4명으로 구성된 아주 작은 조직에 월급 50만 원짜리 경리로 입사했다. 고등학교 졸업식을 하기도 전에 교복을 입고 면접을 보러 갔던 기억이 난다. 나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고, 미술학원을 다닐 만큼만 벌면 된다고 생각했다.
출근 시간 30분 전에 직원들의 책상을 닦고 커피를 타는 것이 내 첫 업무였다. 직원 중 한 명이 커피가 너무 진하다며 다음부터는 연하게 타달라고 했다. 커피가 너무 쓰니 우유를 더 넣어달라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같은 말을 들었다. 물을 더 넣어 묽게 해달라는 의미라는 걸 며칠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나는 그 정도로 말귀를 못 알아들었다.
은행 심부름 역시 주 업무였다. 내일 당장 막아야 하는 어음 때문에 수표를 은행에 가져다주게 됐다. 거액의 수표를 통장에 끼우고 은행으로 갔다. 은행원에게 통장을 내밀었을 때 수표는 없었다. CCTV를 확인해도 찾을 수 없어 한바탕 난리가 났다. 다행히 길에 떨어진 수표를 누군가가 찾아주었는데, 상황이 정리되자 내게 일을 주던 경리 언니가 으름장을 놓으며 말했다.
“다행인 줄 알아. 너 평생 월급도 못 받으면서 노예처럼 일 할 뻔했어.”
그는 대표의 아내였다. 세상 물정 모르는 나는 나약했고 두려웠다. 까마득히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아직까지도 문득 그 장면이 떠오른다.
일을 너무 못해서 힘든 시기가 있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갸우뚱한다.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며. 그런 내가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하며 연봉 1억을 벌고, 출간 작가가 되고, 스타트업을 공동 창업했다. 역시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 커리어 여정이다. 이제 나는 안다. 우리는 모두 예상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리어의 도약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단 하나, 원씽(One Thing)이 있다는 사실을.
단지 일을 잘하는 것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벽
1980년대에 드라이퍼스 형제는 고도로 숙련된 전문가를 관찰해 기술을 습득하는 과정을 연구했다. 그들이 제시한 5단계 기능 습득 모델을 ‘드라이퍼스 모델 (Dreyfus model of skill acquisition)’이라 부른다. 아래 그림은 한 분야의 사람들이 단계별로 얼마큼 분포해 있는지 보여주는 분포도인데 한 가지 특이점이 있다.
바로 가장 높은 5단계 전문가가 고작 1~5%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2단계에서 4단계까지는 대략 절반씩 줄어드는 반면 숙련자에서 전문가로 넘어가는 단계만 급격히 줄어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100명 중에 고작 1명만 전문가라니. 연봉 1억 디자이너가 되었어도 나는 결코 전문가가 아니었다.
일에서 어려움이 사라지고 먹고 살만큼 돈도 벌게 되었지만 ‘그래서 다음은 뭐지?’라는 생각이 한순간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일 잘하는 사람이 되자는 목표만 바라보며 달려온 내게 전문가로 도약하는 건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커리어 정체기에 빠졌다.
‘나는 왜 하나의 직무로 10년을 일했어도 숙련자 단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을까?’
일을 잘하는 것만으로는 풀 수 없는 물음표를 간직한 채로 몇 년을 보냈다.
상위 1% 전문가를 만드는 원씽, 존재감
소프트웨어 장인 협회(LSCC)를 설립한 개발자 산드로 만쿠소는 책 『소프트웨어 장인』에서 말했다.
“소프트웨어 장인은 마스터로서 수련생을 멘토링하고 그들의 여정에 도움을 준다. 지식, 아이디어, 성공 그리고 실패까지도 커뮤니티에서 공유하고 토론하여 업계가 한 걸음씩 더 나아갈 수 있게 해야 한다. (…) 소프트웨어 장인은 항상 다른 사람에게 배우려 하는 겸손한 사람이어야 하고 경험이 적은 개발자와 지식을 공유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소프트웨어 장인』 p.71
그의 말에 의하면 마스터 단계까지 올라간 전문가는 혼자 잘하는 사람이 아닌 함께 잘하는 사람이다. 배우고 실행하면 역량을 향상할 수 있지만 어느 수준까지 올라가면 차이가 미미해진다. 한 사람이 이룰 수 있는 성과는 한계가 있기에 혼자서만 잘하는 사람은 4단계인 숙련자까지 올라가더라도 그 이상으로 도약하기는 어렵다.
상위 1% 전문가가 된다는 건 개인적인 현상이라기보다 집단적인 현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전문가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단지 성과만이 아니라 그가 속한 공동체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그리고 공동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함께 살펴야 한다. 숙련자와 전문가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인 영향력은 오직 커리어 브랜딩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직장인의 브랜딩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일하는 분야에서 존재감을 갖는 것이다. 존재감이란 역량과 철학을 드러냄으로써 ‘이런 사람이 여기 있다’는 것을 내가 일하는 분야의 사람들이 아는 상태다. 해결하고 싶은 문제가 생겼을 때, 새로운 사람을 뽑아야 할 때 머릿속에 나를 떠올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커리어 브랜딩이다. 자기 이름을 걸고 일하는 것이다.
존재감이 있는 사람만이 손에 넣는 것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한 이후로 10년 동안 그림자처럼 살았다. 언제나 조용히 한발 물러나 있는 성향이라 업계는커녕 회사 안에서조차 존재감이 없었다. 기능적인 역량을 개발하는 것만으로는 ‘남아 있는 일의 수명이 길어야 10년’이라는 강박에 시달렸다. 커리어가 정체되었지만 돌파구는 찾지 못하던 시기였다. 이때 절박한 마음으로 선택한 것이 온라인 글쓰기다. 그렇게 나를 드러낸 이후 예상하지 못한 여러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이 불과 3년 전이다.
나는 언제나 일과 전문성 그리고 커리어에 관심이 있었다. 이에 대해 배우고, 적용하고, 생각했다. 물어볼 곳이 없어 스스로 찾았던 지식들을 기록하면서 독자로부터 수많은 피드백을 받았다. 덕분에 나의 고민이 모두의 고민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이때부터 조금씩 나의 존재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후 1년 만에 출간, 강연, 사업으로 활동 범위가 넓어졌다.
회사는 언제나 사람을 찾고 있다. 지원자는 많은데 ‘좋은 인재’는 왜 그리 없는지. 지인을 통해 물색하거나 채용 서비스를 활용해 돈과 인력과 시간을 쓴다. 출판사 역시 언제나 사람을 찾고 있다. 가능성 있는 신진 작가를 발굴하기 위해 늘 안테나를 돌린다. 퍼블리, 클래스101 등의 크리에이터를 필요로 하는 콘텐츠 서비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레이더망에 걸리는 건 존재감이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이다. 적절한 사람을 찾는 일은 그야말로 엄청난 리소스를 필요로 한다.
이름이 브랜드가 되었다고 반드시 전문가인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름 없는 사람이 전문가일 수는 없다. 전문가라면 내가 속한 공동체에 기여함으로서 필요할 때 나를 찾을 수 있을 정도의 존재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커리어 도약의 원씽이다.
글. 이진선
2007년, 디지털 에이전시에서 일을 시작해 웹과 앱, 프로모션 페이지 등을 디자인했다. 일하며 마주한 의문들을 열심히 수집하며 답을 찾았으나 번아웃으로 퇴사한 뒤, 프리랜서로 연 수익 1억 원을 거두며 10년 차 디자이너가 되었다. 2019년, 일터에서 스스로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에 관해 기록하기로 다짐하고 카카오 브런치에 연재를 시작했다. 그렇게 연재한 글로 ‘제8회 브런치북 프로젝트 대상’을 수상했다.
커뮤니티형 온라인 교육 스타트업 '한달어스'를 공동 창업해 2년 동안 운영했다. 지금은 브랜딩 디렉터, 작가, 디자이너, 자기발견 디렉터라는 직업을 병행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가치를 디자인하는 사람, 실패보다 가능성을 보는 사람, 일에 진심인 사람들의 성장과 자립을 돕는 사람을 꿈꾼다. 지은 책으로는 <사수가 없어도 괜찮습니다>가 있다.
연재를 진행합니다
'직장인을 위한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를 주제로 이진선 작가의 에세이가 매월 1회 연재됩니다.(총 6회, 7월~12월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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