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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꿈의 방향을 잃지 않은 고독한 예술가, 반 고흐
    아하 스토리 2025. 1. 7. 17:51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로 꼽히는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년 3월 30일~ ~1890년 7월 29일). ‘빈센트 반 고흐’ 하면 우리는 보통 ‘천재 화가’라는 말을 떠올린다. 그가 천부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거침없이 화가로서의 삶을 살았을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고흐를 살아 있는 동안 인정을 받지 못한 화가, 스스로 자신의 귀를 자른 사람, 자살로 30대에 생을 마감한 불운했던 창작자로만 알고 있었다면, 고흐가 생전에 쓴 편지를 함께 보며 그를 더 알아보자.

     

    〈파이프를 물고 귀를 싸맨 자화상〉 1889년 1월, 캔버스에 유채, 51×45cm.

     

    그가 어릴 때부터 그림에 관심이 있던 것은 아니다

    고흐가 어릴 때부터 그림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숙부 세 사람이 모두 미술상인 덕분에 그는 1869년 7월부터 유명한 미술품 매매점인 구필 화랑의 수습사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1872년 8월, 같은 일을 하게 된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평생에 걸친 두 사람의 편지 왕래가 시작되었다.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는 모두 668통이나 되었다.

    가능한 한 많이 감탄해라! 많은 사람이 충분히 감탄하지 못하고 있다. 산책을 자주 하고 자연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예술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길이다. 화가는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해 평범한 사람들이 그것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사람이다. 화가 중에는 좋지 않은 일은 결코 하지 않고, 나쁜 일은 결코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평범한 사람들 중에도 좋은 일만 하는 사람이 있듯이 말이다.

    1874년 1월,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1875년 5월, 구필 화랑 파리 본점으로 옮긴 고흐는 성서를 탐독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종교에 몰입하게 된다. 그러나 이 때문에 미술품 거래를 혐오하게 되고 고객과 동료 직원들과의 사이가 나빠지면서 직장에서 해고되고 에턴의 부모 곁으로 돌아간 고흐는 기숙학교의 무보수 견습교사, 서점 점원을 전전했다.

     

    1877년 5월 신학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갔지만, 신에 대한 이론적 학습과 실제로 복음을 전파하려는 갈망 사이에서 방황했다. 1878년 7월 신학 공부를 그만둔 그는 전도사가 되려고 했지만, 그의 지나치게 엄격한 태도와 광적인 신앙심, 가난한 사람에 대한 봉사 정신으로 인해 다른 종교인들과 마찰을 빚게 되면서 여러모로 힘든 생활을 했다.

     

    화가로서 첫발을 내딛다

    1879년 여름, 고흐는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동생 테오에게 데생 기법에 관한 책과 물감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마침내 전업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 테오는 경제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나도 이따금 밥벌이란 걸 했다. 그러지 못할 때는 친구들이 선의를 베풀어 도와주었지. 좋든 싫든 얻을 수 있는 것을 취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살아왔다. 내가 많은 사람의 신뢰를 잃었다는 건 맞는 말이다. 경제적인 형편도 좋지 않은 게 사실이고. 내 미래가 처량한 것도 부인할 수 없고, 더 잘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말도 맞다. 생계유지를 위해 노력했어야 할 시간을 낭비했다는 것도 맞는 말이고, 공부가 상당히 허술하고 빈약하며, 필요한 것을 모두 구하기에는 내가 가진 수단이 너무 보잘것없다는 말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해서 내가 점점 퇴보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바로 나올 수 있는 걸까?

    나는 지금 내가 선택한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공부하지 않고 노력을 멈춘다면, 나는 패배하고 말 것이다. 묵묵히 한길을 가면 무언가 얻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나의 최종 목표가 뭐냐고 너는 묻고 싶겠지. 초벌 그림이 스케치가 되고 스케치가 유화가 되듯, 최초의 모호한 생각을 다듬어감에 따라, 그리고 덧없이 지나가는 최초의 생각을 구체화함에 따라 그 목표는 더 명확해질 것이고, 느리지만 확실하게 성취되는 것이 아닐까?

    1880년 7월,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1880년 동생 테오를 통해 브뤼셀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던 라파르트와 알게 되었다. 당시 고흐는 혼자서 해부학을 공부하고 모델을 대상으로 데생 작업을 하면서 한 가난한 화가의 집에서 원근법을 배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부유한 신사 라파르트와 누더기 차림의 부랑자 고흐가 전혀 어울리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견고한 우정이 싹트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흐에게 라파르트는 유일한 네덜란드 친구였으며, 그들의 우정은 5년간 지속되었다. 

     

    1881년 12월 초, 고흐는 가축 그림과 수채화에 뛰어나다는 평을 받는 안톤 마우베에게 수채화와 유화의 원리를 배우기 위해 헤이그로 떠난다. 마우베는 고흐를 화실로 불러 정물화를 그리게 했다. 그가 난생처음 화가 옆에서 그림을 그리는 순간이었으며, 화가로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기도 했다.

     

    새로운 장르에 매료되다

    1882년 1월, 고흐는 마우베와 구필 화랑의 지점장이던 테르스테이흐의 도움으로 헤이그에 아틀리에를 얻어 정착했다. 이때 상시에가 쓴 밀레의 전기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농촌 생활을 그리는 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죽는 날까지 밀레의 전기를 진정한 예술의 길잡이로 여겼다.

     

    다른 화가들과 관계를 끊고 고독하게 작업하던 고흐는 1882년 7월 처음으로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유화도 그렸다. 이 새로운 장르에 매료된 고흐는 일주일 동안 일곱 점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주로 평범한 남녀들을 모델로 100여 점에 이르는 인물 습작을 했다. 1882년 11월에는 처음으로 석판화를 제작해서 테오에게 시험쇄를 보냈고, 석판화 〈슬픔〉을 본 미술상이 특별 주문을 의뢰해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테오야, 터널이 끝나는 곳에 희미한 빛이라도 보인다면 얼마나 기쁘겠니. 요즘은 그 빛이 조금씩 보이는 것 같다. 인간을, 살아 있는 존재를 그린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물론 그 일이 힘들긴 하지만, 아주 대단한 일임에는 분명하다.

    1882년 3월 3일,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슬픔〉 1882년, 연필 스케치, 44.5×27cm.

     

    1885년 4월 말에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렸다. 이것은 그가 처음 시도해보는 대규모 구성 작품이었다. 이 그림은 어두운 색조를 띠고 있는데, 그 후로 밝은 색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언젠가는 〈감자 먹는 사람들〉이 진정한 농촌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감상적이고 나약하게 보이는 농부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다른 대상을 찾겠지. 그러나 길게 봤을 때는 농부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온화하게 그리는 것보다 그들 특유의 거친 속성을 살려내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다. 여기저기 기운 흔적이 있고 먼지로 뒤덮인 푸른색 치마와 상의를 입은 시골 처녀는 날씨와 바람, 태양이 남긴 기묘한 그늘 아래에 있을 때 숙녀보다 더 멋지게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숙녀들이 입는 옷을 걸친다면 특유의 개성은 사라져버릴 것이다. 마찬가지로 농부는 일요일에 교회에 가려고 신사복을 차려입었을 때보다 작업복을 입고 밭에 나가 있을 때가 더 좋아 보인다.
    이와 비슷하게, 농부의 삶을 담은 그림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세련되게 그리는 것은 잘못이다. 농촌 그림이 베이컨, 연기, 찐감자 냄새를 풍긴다고 해서 비정상적인 게 아니다. 마구간 그림이 거름 때문에 악취를 풍긴다면 훌륭하다고 해야겠지. 바로 그게 마구간이니까. 밭에서 잘 익은 옥수수나 감자 냄새, 비료 냄새, 거름 냄새가 난다면 지극히 건강한 것이다. 특히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런 그림이 그들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농촌 생활을 그리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그러나 예술과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진지한 반성을 하게 될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면 나 자신을 용납할 수 없다.
    밀레나 드 그루 같은 화가들이 “더럽다”, “저속하다”, “추악하다”, “악취가 난다” 등등의 빈정거림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꾸준히 작업하는 모범을 보였는데, 내가 그런 악평에 흔들린다면 치욕이 될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되지. 농부를 그리려면 자신이 농부라고 생각하고 그려야 한다. 농부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똑같이 느끼고 생각하며 그려야 할 것이다.

    1885년 4월 30일,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감자 먹는 사람들〉 1885년 4월, 캔버스에 유채, 81.5×114.5cm.

     

    파리에서 인상주의 회화를 접하다

    1886년, 파리에 온 고흐는 탕기 영감이 운영하던 클로젤 거리의 그림물감 상점에서 로트레크, 앙케탱, 베르나르, 러셀 등을 만났다. 고흐는 4월에 이들과 합류하면서 인상주의 회화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리면서 과음과 퇴폐적인 생활에 빠진 그는 건강이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을 받아 화풍에 변화가 생겼고, 한때 점묘파의 기법에 심취하기도 했다.


    6월, 그는 벵 화랑에 전시된 일본 그림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그의 그림의 색채는 더 밝아지고, 양식도 많이 변했다. 11월에는 샬레 레스토랑에서 ‘프티 불바르의 인상파 화가들’이라는 전시회를 열었는데, 그의 작품과 함께 앙케탱, 베르나르, 드코닝, 로트레크 등의 작품을 전시했다. 이 전시회를 통해 고갱, 기요맹, 쇠라 등을 알게 되었다.


    파리에 온 지 1년 6개월이 지나자 이 도시에 대해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더 많은 빛과 색을 찾아 남프랑스의 아를로 떠났다. 고흐는 파리에서 자화상, 정물화, 몽마르트르 풍경 등 200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고갱과 다툰 후 자신의 귀를 자르다

    1888년 2월 20일, 고흐는 하얗게 눈 내린 아를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그는 꽃이 핀 과일나무 연작을 그렸다. 1880년대 말, 모네가 여러 작품으로 구성된 연작을 그렸던 것처럼 고흐도 꽃나무 그림을 각각 분리된 작품이 아니라 하나의 연작으로 생각하며 작업을 했다.

     

    아를에 와서도 테오를 통해 파리에 있는 젊은 화가들과 편지를 주고받던 고흐는 노란 집을 아틀리에로 꾸며서 화가 공동체의 거점으로 삼으려 했다. 이 계획의 일환으로 그는 고갱을 초대했다. 9월 16일 고흐는 고갱이 와주기를 기대하며 노란 집으로 이사했고, 10월 23일 도착한 고갱과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두 사람 모두 작업에 몰두해 많은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12월 들어 예술에 대한 견해 차이로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심해졌다. 12월 23일 고갱과 심하게 다툰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잘랐다. 고갱은 급히 파리로 떠났고, 고흐는 2주 동안 병원에 입원했다.

    이번에 그린 작품은 나의 방이다. 여기서만은 색채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 그것을 단순화하면서 방에 더 많은 스타일을 주었고, 전체적으로 휴식이나 수면의 인상을 주고 싶었다. 사실 이 그림을 어떻게 보는가는 마음 상태와 상상력에 달려 있다.
    벽은 연한 보라색이고, 바닥에는 붉은 타일이 깔려 있다. 침대의 나무 부분과 의자는 신선한 버터 같은 노란색이고, 시트와 베개는 라임의 밝은 녹색, 담요는 진홍색이다. 창문은 녹색, 옆에 놓인 탁자는 주황색, 세숫대야는 파란색이다. 그리고 문은 라일락색.
    그게 전부다. 문이 닫힌 이 방에서는 다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가구를 그리는 선이 완강한 것은 침해받지 않는 휴식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벽에는 초상화와 거울, 수건, 약간의 옷이 걸려 있다. 그림 안에 흰색을 쓰지 않았으니 테두리는 흰색이 좋겠지.
    이 그림은 내가 강제로 휴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데 대한 일종의 복수로 그렸다.

    1888년 10월 16일,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1889년 1월, 예상 밖으로 빨리 회복한 그는 노란 집으로 돌아왔고, 〈귀에 붕대를 감고 있는 자화상〉 〈양파가 있는 정물〉 〈자장가〉 등을 그렸다. 그러나 여전히 환각 증상이 나타났고, 그를 불안하게 여기던 주민들의 고발로 3월 말까지 병원에 강제 입원되었다.

     

    〈침실〉 1888년 10월, 캔버스에 유채, 72×90cm.

     

    파란 가득한 삶을 마감하다

    끝 모를 죄책감과 무력감에 시달리던 고흐는 1889년 5월, 프로방스의 생레미에 있는 생폴드 무솔 요양원으로 들어갔다.

    동물원 같은 곳에 갇힌 미친 사람들의 생활을 직접 보고 있으면 막연한 불안이나 공포가 사라진다. 그러면서 정신병도 다른 여느 질병과 같은 병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게다가 환경을 바꾼 것도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두 점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보라색 붓꽃 그림과 라일락 덤불 그림으로, 모두 정원에서 얻은 소재다.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이 다시 생겨나고 있다. 일을 할 수 있는 능력도 다시 회복될 것이다.
    아무래도 요령 있게 살아가기에는 내가 너무 현실적이지 못 한 것 같다.

    1889년 5월,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9월에 〈별이 빛나는 밤〉과 〈붓꽃〉 두 점이 파리 앵데팡당 살롱전에 전시되었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즈음 고흐의 작품은 동료 화가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으며, 테오의 집은 물론 탕기 영감의 미술용품 가게에도 전시되었다. 그러나 고흐는 12월 말, 일주일이나 계속된 발작으로 심한 고통을 받았다. 갑자기 물감 튜브를 빨아먹다가 발작이 진정되면 평소처럼 그림을 그리곤 했다.

    사랑하는 동생아, 이번 발작은 바람이 많이 부는 날 들판에서 그림 그리느라 바쁠 때 일어났단다. 그 그림을 네게 보내주 마. 발작이 일어났지만 그림은 완성했거든.
    난 더 소박한 그림을 그리려 시도하고 있었다. 색채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뿌옇게 칠했다. 연초록색, 빨간색, 바랜 듯한 황토색 등으로. 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이따금 북유럽에 있을 때와 같은 팔레트로 다시 시작하고 싶은 강한 욕망을 느끼곤 한다.

    1889년 8월 말,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1890년 1월 18일 브뤼셀의 20인전에 그의 유화 여섯 점이 전시되었고, 권위 있는 평론가 알베르 오리에의 지극히 호의적인 평론 〈고독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르 메르퀴르 드프랑스》에 실렸다. 그리고 전시되었던 〈붉은 포도밭〉이 400프랑에 팔렸다. 이것은 그의 평생에 유일하게 팔린 유화 작품이다.


    1890년 5월 17일, 생레미 요양원의 생활을 견딜 수 없었던 고흐는 테오의 권유로 파리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갔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도 오래 머물지 않으려 했다. 그는 또 떠나기로 했는데, 이번 행선지는 오베르쉬르우아즈였다. 그곳에는 의사이자 화가이며 피사로와 폴 세잔의 친구인 폴 가셰가 있었다.

     

    오베르쉬르우아즈로 옮긴 고흐는 라부 여인숙에 방을 얻어 살면서 닥터 가셰의 치료를 받았다. 1890년 7월 27일, 초라한 다락방의 침대 위에 피를 흘리고 누워 있는 고흐를 라부의 가족이 발견했다. 그가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쏜 것이다. 오베르쉬르우아즈의 성 뒤쪽에 있는 밀밭에서.


    이튿날, 파리에 있던 테오가 와서 두 형제는 이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날 밤 고흐는 의식을 잃었고, 7월 29일 새벽 1시 30분 동생의 품에 안긴 채 “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파란 가득한 삶을 마감했다.

     

    〈별이 빛나는 밤〉 1888년 9월, 캔버스에 유채, 72.5×92cm.


    고흐는 동료 화가 베르나르에게 ‘언제쯤이면 늘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을 그릴 수 있을까?’라고 쓴 편지를 보내고 3개월 후, 그 유명한 〈별이 빛나는 밤〉을 완성한다. 그는 ‘노력이 통하지 않는 시대 같다’고 푸념하면서도 꺾이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노력할 것’이라고 반복해 말하며 꿈을 위해 애쓰는 청년,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원하는 것을 얻는 사람이었다.

     

     

     

     

    ✅ 출처: 반 고흐, 영혼의 편지 & 반 고흐, 영원한 예술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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