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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빅! 문제는 마음이 아니라 몸이라고요 by 박소연아하 에세이 2021. 7. 22. 11:07
고등학교 때 일이다. 간밤에 심해진 복통으로 고통스러워하던 나는 울상이 된 채로 등굣길에 나섰다. 몸을 펴지도 못하고 기어가듯 걷다 보니 갑자기 울컥, 짜증이 올라왔다.
‘내가 왜 이렇게 고생해야 해? 약도 먹었잖아! 몸에게 누가 주인인지 보여주겠어.’
그리고는 복통으로 펴지도 못하는 몸을 억지로 곧게 세우고 학교까지 전력 질주해서 뛰어가기 시작했다. 쥐어뜯기는 통증이 올라왔지만 무시했다. 그렇게 십 분쯤 달려 학교에 도착하고 나서 내 몸을 확인해보니 복통이 마법처럼 사라진 게 아닌가? 나는 의기양양한 마음으로 교문을 통과했다. ‘역시 마음을 굳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법이야.’ 그때의 어린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이런 부류의 믿음은 삶에서 오랫동안 이어졌다. 졸리더라도 눈을 비비며 전공 서적을 읽었고, 체력 한계가 턱 끝까지 차올라도 회사 일정을 어떻게 하든 마무리했다. 출장 일정 동안 하루에 두 시간 남짓 자면서도 정장과 풀 메이크업 차림으로 새벽에 나왔다. 몸을 윽박질러서 내일의 에너지를 오늘 당겨서 쓰는 삶의 태도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런 아슬아슬한 방식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다. 아니나 다를까,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아주 사소한 문제 때문에 임원에게 불려가 잔뜩 혼이 난 날에 터지고 말았다.
“아니, 본부장님은 왜 저에게 뭐라고 하시는 거죠?”
“뭐라고 한 게 아니라 상황을 설명한 거잖아. 본부장님 입장을 생각해보면….”
“지금 몇 달째 제대로 된 주말도 없이 일하는데 겨우 그거 하나로 욕먹으니 황당해요. 이럴 거면 일을 아예 안 하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요? 안 하면 욕도 안 먹을 테니까요!”
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그리고는 덩달아 같이 혼난 죄 밖에 없는 심약한 팀장에게 분통을 터트렸다. 아마 이때가 회사에서 처음으로 날것의 감정을 표출한 날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도 한동안 회사에 관련된 모든 것이 꼴 보기 싫고 짜증이 났는데, 아무리 책을 보고 명상을 하고 마음을 다스려도 해결이 되지 않았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차분한 마음으로 출근해도 누군가 꼴 보기 싫어지는 데는 10분조차 걸리지 않았다.
실존적 괴로움과 헝클어진 마음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었을까. 나는 굳은 의지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흔들리는 나의 마음에 가끔 낙심했다. 다행히 이 사건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해결은 아주 엉뚱한 곳에서 왔다. 우습게도 프로젝트가 끝나서 부족한 수면, 대충 먹는 점심, 주말 반납 생활이 끝나자 팝콘처럼 튀어 오르던 불만과 미움이 저절로 해결되었다. 몸이 회복되자 자연스럽게 마음도 보들보들해진 것이다. 아, 나는 그때 처음으로 시인하게 되었다. 굳건한 의지와 깡으로 버틸 수 있는 나이가 지났구나.
나는 어설픈 계획형 인간이다 보니 매년 여러 가지를 새로 결심한다. ‘주위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공부와 경험을 통해 성장하기’‘부정적인 생각 안 하기’ 등등. 하지만 실천은 계획보다 늘 한참 뒤에서 따라오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예전에는 빈칸이 숭숭 난 계획표를 보면서 빈약하기 짝이 없는 나의 의지와 결단력을 미워했었다. 아,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앞으로 나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
하지만 이제는 나를 미워하기 전에 두 가지를 스스로 물어본다.
첫째, 제대로 먹고 있나?
주전부리, 기름진 즉석식으로만 이뤄진 식단을 사흘 이상 지속하면 나는 어김없이 부정적인 생각에 빠진다. 그럴 때는 굳건한 의지를 불태우는 대신 양질의 단백질(경험상 1++ 한우가 가장 효과가 좋다)을 입에 넣어준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나면 거의 예외 없이 긍정적인 마음으로 변한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아까까지 꼴도 보기 싫던 원서를 ‘오늘은 그냥 훑어보기라도 할까.’라며 슬쩍 펼친다. 일찍이 한 현자도 트위터에 올려주지 않았는가. 사랑, 자비, 따뜻함, 배려심 같은 아름답고 넉넉한 것들은 마음이 아니라‘탄수화물’에서 오는 것이라고.
둘째, 제대로 움직이고 있나?
집필이나 강의자료도 막히고, 공부도 하기 싫고, 이래저래 다 짜증이 날 때가 있다. 예전에는 심각하게 고민하며 며칠을 허비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이 밀려올 때 그냥 밖에 나가서 산책하거나 몸을 움직인다. 체력이 고갈된 상태에서는 뭐든지 거슬리고 문제는 위협적으로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약간의 땀을 흘리며 바람과 땅의 경사를 발바닥에서 몇십 분 느끼다 보면 대부분의 부정적 생각은 사라진다.
한때 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에너지가 100이 필요한 일이 생겼을 때, 몸에 20, 마음에 80의 책임을 지웠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굳건한 의지와 마음이 있으면 없던 체력이 생겨나는 게 아니었다. 미래의 에너지를 가불하는 것뿐이었다. 심지어 허리와 목의 무료구독 기간은 25세가 넘으면서 끝났다. 혹사당한 몸은 언젠가 고리대금 업자처럼 등장해서 불어난 이자와 함께 채권 수표를 내 눈 앞에서 흔들 것이다.
그래서 이제 나는 몸에 50, 마음에 50을 배정한다. 앞으로 나이가 들수록 체력에 맞춰서 마음을 기대는 일이 많아지겠지. 인생에서 하고 싶은 일이 아직 많이 남은 나는 오늘도 몸에게 공손히 부탁한다.
‘한우와 생선구이, 신선한 과일을 규칙적으로 입에 넣어주고, 매일 꾸준히 산책하고, 코로나 끝나면 요가도 다시 시작할 테니,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글. 박소연
하루에 4시간 일하면서 돈도 꽤 잘 벌고 싶어서 작가가 되었다. 베스트셀러 <일 잘하는 사람은 단순하게 합니다>, <일 잘하는 사람은 단순하게 말합니다>의 저자이다. 신입사원부터 경영진까지 일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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