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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흐르는 시간이 허무한가요? 월말결산을 하면 생기는 일 by. 김신지
    아하 에세이 2023. 4. 6. 15:10

     

     

    생각해보면 기록 생활을 시작한 건 나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해야 하는 일들에 쫓기다 보면 하루가 허무할 만큼 빨리 흘렀다.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창밖을 바라보면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던 날들. 일할 시간은 있지만 내 삶에 대해 생각할 시간은 없는 채로 피곤에 지쳐 잠들기 일쑤였다. 그런 날들이 쌓이자 점차 방향을 잃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나에게 필요한 일들을 하고 있는데, 열심히 살고 있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데, 자주 허무했다. 시간의 거센 물살에 휩쓸려 나라는 조각배가 떠내려가고 있었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몇몇 기록을 시작한 건 루틴이라든가 갓생이라든가, 이미 열심히 살고 있는데 또 하나의 열심을 더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내 삶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잠들기 전 5분이라도 가만히 멈춰 서서 내가 보낸 하루에 대해 생각하고 싶었다. 같은 일상을 산대도 내 시간을 내 관점에서 정리해보는 삶과 그냥 흘려보내는 삶은 분명 다르리라 믿으면서.

     

    월말결산을 시작한 건 그 즈음이었다. 매일 쓰는 5년 다이어리가 일기라면 월말결산 기록은 월기라 해야 할까(이 방식은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책에서도 매달 나만의 베스트를 가려보기 #월말결산이라는 소제로 자세히 다룬 바 있다). 내가 활용 중인 월말결산 방식은 무엇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주제별 결산, 월별 결산 두 가지로 나뉜다.

     

     

    (c) 김신지

    주제별 결산은 한 페이지에 하나의 주제를 정한 뒤 그 아래 1월부터 12월까지 그달의 베스트를 적어두는 방식이다. ‘이달의 책을 주제로 삼았다면 매달 읽고 좋았던 책을 적어둠으로써 한 페이지 혹은 펼침면 두 페이지에 걸쳐 1년을 채우는 방식. ‘이달의 음악’, ‘이달의 문장’, ‘이달의 인물’, ‘이달의 맛집’, ‘이달의 새로운 경험등 각자의 취향에 따라 얼마든지 리스트를 늘려갈 수 있다.

     

    이 방식의 진가는 연말에 발휘된다. 방송사마다 가요대상, 연예대상을 가리느라 분주한 12, 우리도 각 페이지를 들여다보며 내 인생의 소소한 연말대상을 열어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저기 흩어진 기록을 뒤적이거나 애꿎은 기억력을 탓할 필요 없이, 색연필 한 자루를 쥐고 이달의 OO’ 중 마침내 올해의 OO’으로 등극할 베스트 오브 베스트에 동그라미만 치면 되니 얼마나 편하고 즐거운 방식인지! 이미 매달 치열한 결선을 거친 목록 중에서 가장 좋았던 것을 꼽게 되니, 진정한 의미에서 나만의 올해의 OO’을 가리는 셈이다. (4월이면 아직 한 해의 1/4을 지나는 지점이니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았다는 게 포인트!)

     

    (c) 김신지

     

    월별 결산은 한 페이지에 한 달 치 종합 결산을 하는 방식이다. 올해부터는 노션을 활용해 기록을 쌓아가고 있다. 우선 매달 ‘4: _______ 했던 달이라고 이번 달에 어울리는 이름을 붙여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직접 지은 이름(제목)을 고민하는 동안 이번 달은 나에게 어떤 인상을 남긴 시간인지 한마디로 정리해보게 된다. 그 아래로 이달의 OO이 이어진다. 이달의 주요 사건(나에게 일어난 중요한 일들), 이달에 주운 행복의 ㅎ(나를 웃게 한 소소한 순간들), 이달의 사람들(누구를 만나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이달의 장소(내가 머물거나 들른 곳 중 기억에 남는 곳), 이달의 콘텐츠(영감이 되어준 음악, 영상, 책 등), 이달의 소비(이건 정말 잘 샀다 싶은 것), 이달의 고마움(생각지 못했는데 내게 도착한, 적어두고 싶은 고마운 마음들) 등을 적는다. 이 리스트 역시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변주 가능하다. 어떤 달엔 특기할 게 없어 건너뛰는 주제도 있고, 어떤 달엔 적을 게 많아 하염없이 목록이 길어지는 주제도 있다. 매달 다른 모양의 기록이 남는다. 나라는 사람이, 내가 보낸 시간이 점점 선명해지는 느낌이다.

     

    인스타그램에 #월말결산 해시태그를 검색해보면 다양한 사람들이 남긴 결산 내역을 볼 수 있다. 그걸 들여다보는 것도 기록러의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다. 기록이야말로 견물생심. ‘보면마음이 생긴다’. 남의 기록을 보면 내 기록을 하고 싶어진다. 나도 저 목록을 추가해봐야지, 저 스티커 귀엽네, 하며 참고도 된다. 사람들이 저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매듭짓고 정리해두는지 살펴보면서 기록하고픈 마음이 자연스레 예열되는 것이다.

     

     

    (c) 김신지

    물론 월말결산을 안 해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지금껏 그래왔듯 3월에서 4월로, 4월에서 5월로 건너뛰며 살 수도 있겠지. 하지만 하면 생긴다. 고유한 즐거움이. 단단한 일상력이. 이번 달 내가 어디에 가고 누구를 만나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았는지 돌아보고 정리하는 일은 별거 아닌 것 같아도 내가 딛고 선 발밑을 자분자분 다지는 일이 된다. 단단해진 현재 위에서 앞으로 다가올 날들을 맞이하게 해준다.

     

    내게는 매달 마지막 날 저녁이 월말결산 타임이다. 나와 잡은 약속이라 여기고 되도록 지키려고 노력한다. 한 시간 남짓 책상 앞에 앉아 지난 일기와 휴대폰 사진첩, 그간 나눈 메신저 대화 등을 뒤적이며 이달의 OO’을 채워나간다. 내가 보낸 한 달의 시간을 아끼는 상자에 넣어 차곡차곡 정리하고 인덱스를 붙이고 어울리는 끈을 찾아 잘 묶은 뒤 기억의 서랍 한편에 넣어두는 기분이다. 그래서일까. 이제 더 이상 시간의 거센 물살에 떠내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회고와 기록을 했을 뿐인데. 시간의 너른 바다를 항해 중인, 묵직한 중심을 가진 배가 내 삶이고, 이 배의 방향키를 잡고 있는 사람이 나라는 감각을 분명히 느낀다. 올해의 끝에서 나는 어떤 뭍에 닿아 있을까. 그건 아마 지나간 월말결산 기록들이 말해줄 것이다.

     

     

     

     

    🔰 p.s. ‘월말결산’ 양식을 공유합니다.

    '이달의 OO’을 추가하거나 자유롭게 변형해서 매달 내게 딱 필요한 회고를 해보세요.

    https://www.notion.so/summerbeer/2023-759cc2e032ca47a0a53f0887a218cdb9?pvs=4

     

    (공유) 2023 월말결산

    활용 팁 ① ‘OO했던 달’이라고 이번 달에 이름을 붙여보세요 ② ‘이달의 OO’을 나에게 맞게 변주해가며 월말결산을 해보세요 📷 e.g. 다이어리, 스케줄러, 휴대폰 사진, 카톡 대화 다시 보기

    www.notion.so

     

     

     

     


    글. 김신지

    ‘내가 쓴 시간이 곧 나’라는 생각으로 걷고 쓰고 마시는 사람. 잡지 에디터로 일을 시작해 <PAPER> <AROUND> <대학내일>  등에 글을 쓰고 트렌드 미디어 ‘캐릿Careet’을 운영하다가 시간이 필요하다고 중얼거리며 회사 밖으로 나왔다. 이제야 하루가 내 것이 되었다는 안도 속에서 ‘살고 싶은 바로 그 시간’을 사는 연습을 하는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여행지에서 마시는 모닝 맥주. 지은 책으로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평일도 인생이니까》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게 취미》 등이 있다. 삶의 여백을 사랑하는 일에 대해 계속 쓰고 싶다.

     

    연재를 진행합니다

    <회고의 힘>을 주제로 김신지 작가의 에세이가 매월 1회 연재됩니다.(총 2회, 종료)

    1화. 나는 왜 꾸준하지 못할까? 고민하는 사람에게
    2화. 흐르는 시간이 허무한가요? 월말결산을 하면 생기는 일(현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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