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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틴, 삶을 지키는 나만의 고유한 패턴 by 이광민
    아하 에세이 2023. 4. 27. 19:55

     

    기억을 더듬어 보면 처음 불렸던 내 별명은 거북이였다. 솔직히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마 또래보다 걷는 게 느렸기 때문이 아닐까? 항상 등교 시간에 빠듯하게 도착했다. 지각을 밥 먹듯 했고 그건 다 커서도 마찬가지였다. 바쁘게 서두르지만, 아침 일정은 항상 여유 없이 도착하거나 살짝 지각! 지각 대장이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늦게 일어나니까.

     

    학교 성적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음에도 잦은 지각 탓에 나에 대한 인식은 게으름뱅이였다. 지각도 그렇지만 공부나 숙제도 바로바로 하기보다는 미루어뒀다가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몰아서 하는 식으로 살았다. 의과대학을 다닐 때도 그랬다. 우리 때는 매주 토요일 아침마다 시험이었는데 남들은 매일 꼬박꼬박 공부한다면 나는 수요일쯤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시험 전날인 금요일이 되면 실컷 늦잠을 자고 느지막이 학교에 나와서 밤을 새워 공부하고, 다음 날 아침에 벌게진 눈으로 시험을 쳤다. 이렇게 공부를 해도 의과대학을 들어가서 낙제 없이 평균 이상의 성적은 유지했으니 효율성은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부모님은 항상 나를 보고 혀를 찼다. “머리는 좋아서 열심히 하면 훨씬 잘할 텐데게을러서 원.”

     

    당시만 하더라도 미라클 모닝’, ‘아침형 인간등등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하루를 부지런하게 보내는 것이 우등생이자 성공하는 사람의 특징이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정반대 편에 있는 사람이었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뭔가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나의 게으름은 부족한 의지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나의 게으름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타고난 생물학적 특성 때문이고, 또 문제 자체도 아니라는 걸 정신과 의사가 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정확히는 나의 고유한 생리적 시간대와 나에게 주어진 사회적 시간대가 서로 맞지 않기 때문에 게으르게 보이는 것이지 내 잘못은 아니라는 거다!

     

    우리 몸에는 일주기 리듬이라는 고유의 시계가 있다. 아침이 되면 깨어나고 밤이 되면 자연스레 졸리도록 일정하게 움직이는 생체 시계이다. 그런데 이 생체 시계는 우리가 생활할 때 사용하는 24시간 주기의 시계와 살짝 어긋나 있다. 일주기 리듬은 개인차가 있기는 하지만 평균적으로 24시간보다 15분 정도 늦다. 그러니 우리 몸의 시계는 사회적 시계보다 매일 15분씩 늦춰지는 셈이다. 우리가 시간을 전혀 모른 채 컴컴한 공간 안에서 여러 날을 지내게 되면 잠자고 깨는 시간은 정상적으로 조금씩 뒤로 밀린다. 15분 정도씩 어긋나는 시계를 우리는 일정한 활동과 눈에 들어오는 빛으로 24시간에 맞도록 수정한다. 그러니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부지런히 노력하지 않으면 24시간 기준으로 수면 패턴을 맞추지 못하고 늦잠을 자고 게을러진다. 이 이론에 따르면 나는 의지 부족인 게으름뱅이가 된다.

     

    그런 일주기 리듬의 기존 이론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은 2000년 무렵이었다. 일주기 리듬 자체와 이를 일정하게 조절하는 과정에 관여하는 유전자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유전자에 따라 누군가는 24시간보다 조금 긴 또는 훨씬 긴 일주기 리듬의 시계를 가질 수 있고, 유전자에 따라 일주기 리듬을 24시간에 맞게 빠르게 잘 맞추면서 살아갈 수도 있다. 단순히 노력만으로 조절되는 게 아니라 고유 생물학적 특성으로 타고나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나는 기본적으로 24시간보다 늦게 일어나는 특성을 타고났을 수 있고, 그 일주기 리듬이 사회적 시계와 맞지 않기 때문에 지각을 한 셈이다. 아침형 인간에게 아침이 있다면 나에게는 저녁이 있다. 이 유전자의 메커니즘을 밝혀낸 3명의 과학자(Jeffrey C. Hall, Michael Rosbash, Michael W. Young)2017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는다.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고유 특성이 있다. 그 고유 특성이 내 삶의 스케줄과 맞지 않으면 당연히 삐걱거린다. 나의 고유 특성에 맞는 생활 패턴으로 살면 오히려 삐걱거릴 일이 없다. 일주기 리듬의 특성을 알게 된 이후 난 더이상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중요한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되도록이면 아침잠을 더 자려 하고 다음 날을 위해 무리해서 일찍 자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게으른 게 아니라 내 유전자가 아침 활동과는 맞지 않으니까. 대신 늦게까지 일하고 활동을 한다. 그렇게 생활 패턴을 일정하게 유지하고부터는 컨디션도 좋아지고 일의 효율도 오히려 나아졌다. 무조건 아침형 인간이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나에게 맞는 생활 패턴으로 사는 게 일도 더 잘되고 건강에도 좋다. 그러고 보니 최근 학교에서는 등교 시간이 다소 늦춰지고 회사에서도 탄력근무제가 도입된 것을 보면 의학적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나에게 맞는 생활 패턴, 알맞은 루틴이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나를 지켜주기 때문이다. 억지로 아침형 인간이 될 필요는 없지만, 하루 중 일정하게 유지되는 생활 패턴은 우리의 마음, 즉 정신적 영역에도 큰 영향을 준다. 나의 환자들 중에서도 생활의 리듬이 무너져서 우울증이나 번아웃 증후군이 발생한 케이스를 자주 보곤 한다. 그럴 때 나는 수면 등의 일상의 패턴에서 얼마나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자신의 활동 에너지를 잘 관리했는지부터 확인한다.

     

    일주기 리듬이 무너지는 가장 큰 요인은 불규칙한 생활 패턴이다. 수면 시간이 들쭉날쭉하면 삶의 패턴이 깨진다. 일주기 리듬이 깨지면 몸도 정신도 망가진다. 시간대가 완전 다른 나라에 가면 시차로 인해 낮에도 피곤하고 집중도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폭음을 하거나 과로를 하면 어김없이 일상의 루틴이 무너진다. 일찍 자든 늦게 자든 그 시간이 비교적 일정하다면 이건 나의 고유 특성이다. 하지만 일상생활의 리듬이 불규칙적으로 뒤죽박죽 엉망진창인 경우라면 인정하자. 이건 내가 몸과 마음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거다. 일정하게 자고 일정하게 깨는 고유한 패턴을 지키려는 노력은 나의 몸과 마음을 적절히 돌아가게 하는 기본이다.

     

     

     

    글. 이광민

    정신의학과전문의, 마인드랩 공간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서울대학교병원 공공보건의료사업단 진료·임상교수를 지냈다. 환자들에게 정서적으로 편안하고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해왔고, 정신의학 관련한 여러 의학적 지식을 대중적으로 공유하는 활동을 넓히고 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 출연하여 여러 범죄사건, 사회문제 등에 대한 정신의학적 자문을 해오고 있으며, 유튜브 ‘의학채널 비온뒤’ 등에 출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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