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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래, 그럴 수 있어🌊
    아하 스토리 2022. 6. 24. 14:39

     

    🌊

     

    억수 같은 비가 내리던 밤, 친구가 집 앞에 찾아온 적 있었다. 우리는 비를 피해 근처 펍으로 향했고,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테라스에 앉아 비를 보기로 했다. 서로의 말도 잘 들리지 않을 만큼 퍼붓던 비를 바라보던 그가 말했다.

     

    “지금이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것 같아. 소리 질러볼래?”

     

    무슨 청춘 영화 찍냐며 웃어넘기려는데 그가 갑자기 긴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 외침은 금세 빗줄기에 묻혀 사라졌다. 바로 옆에서 지른 소리였는데도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너도 해봐. 시원해.”

     

    사뭇 진지한 그의 말에 숨을 크게 들이켰지만 몸 깊은 곳에 서 출발한 소리는 혀끝에서 턱하고 막혀 나오질 않았다.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가 신음과 함께 섞여 나왔다. 어른이 된 뒤로 그렇게 큰 소리를 질러본 적 없단 걸 깨달았다.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그는 여러 번 소리를 질렀고 결국 나도 눈을 질끈 감고는 소리를 질렀다.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던 정제되지 않은 것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날의 묘한 해방감은 비 오는 날 서핑을 할 때마다 떠오른다.

     

     

    나는 비 오는 날의 서핑을 좋아한다. 쏟아 내리는 비를 피하거나 막지 않고 온전히 몸으로 막아내는 건 도시에서는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도시에서는 비를 맞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우산을 이리저리 움직인다. 옷자락이 조금이라도 젖으면 찝찝하다. 도시에서 비를 온전히 맞는 사람은 반드시 슬픈 사연이 있어야만 할 것 같다. 비를 맞으며 제주의 골목을 뛰놀던 날들이 분명 존재했었는데, 어른이 된 뒤로 잊은 것은 소리를 지르는 일만이 아니었다. 수면 위에 앉아 파도를 기다리며 비를 맞다 보면 빗속에서 소리 지르던 그날과 비슷한 해방감을 느낀다. 억지로 막을 것도 도망칠 것도 없이 그냥 순리대로 흐르는 대로 살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비가 몸 위로 토닥토닥 떨어진다.

     

    그래서일까, 서핑을 시작한 뒤로

    ‘그래, 그럴 수 있어’라는 말버릇이 생겼다.

     

    세상 모든 일은 그럴 수 있으니 그대로 두자는 생각의 흐름이 생긴 것이다. 외부의 시선과 평가에 매달리던 나에게 이 문장은 마치 마법의 주문과도 같다. 나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전해 들어 속상한 순간이 찾아와도, 그래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한마디 툭 던지면 크게 개의치 않게 되었다. 실수를 하더라도, 누가 나를 힘들게 하더라도 그냥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어떠한 일도 더 이상 커지지 않고 흘러 지나갔다. 물론 성인군자는 아닌지라 주변 눈치를 보거나 남과 비교하는 예전 습관들이 나올 때도 있으나 그 횟수가 현저히 줄어든 것만으로도 삶의 질은 높아졌다. 타인의 칭찬에는 “에이, 아니에요” 대신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하기로 했다. 나의 생각엔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이 있더라도 타인의 눈에는 칭찬할 만한 일일 수 있다. 그럴 수 있다. 겸손과 자학은 한 끗 차이다.

     

    어디선가 외부가 정한 기준에 맞춰 성장하는 건 ‘자기 계발’이지만 스스로를 돌보며 나아가는 건 ‘자기 관리’라는 글을 읽은 적 있다. 외부의 기준은 내가 바꿀 수 없지만, 나를 돌보는 방법은 내가 정할 수 있기에 유의미하다. 몇 년 전 ‘소확행’이란 말이 유행한 적 있다. 작더라도 소중한 일상의 순간을 통해 자신을 돌보는 것 역시 긍정적인 자기 관리 방법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소소함을 주어진 일상에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찾아 나서는 것 또한 중요하지 않을까. 나에게 서핑이 그러했던 것처럼 스스로를 돌봄에 있어 더 많은 선택지가 생길 테니 말이다. 물론 서핑이 그에 대한 정답이라 말할 생각은 없다. 그저 내가 서핑을 찾은 것처럼 많은 사람이 자신을 돌볼 방법을 찾길 바랄 뿐이다. 그렇게 모두 함께 조금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예상치 못한 사람에게서 ‘잘 지내?’라는 메시지를 받았던 날, 회사에서 나와 길을 건너고 있었다. 건너편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그들을 보며 지구인 모두가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뜬금없이 전 인류적으로 생각했다.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끔 그런 소망을 가진다. 나로 인해 누군가가 매일 행복할 수는 없더라도, 힘든 날이면 조금이라도 위안을 줄 수 있길 바라곤 한다.

     

    괴로워하는 친구를 위로하던 밤, 어떤 말을 하더라도 마음을 전하거나 그녀를 다독이기에 충분하지 못함에 속상해했었다. 카피라이터라는 인간이 이렇게도 진부한 단어와 문장만 을 가지고 있다니……. 어쩌면 필요한 말은 내 속에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비어 있음과 상관없이 친구는 행복하길 기도했다. 두서없이 글을 쓰는 이 순간도 그때와 같은 마음을 담고 있다. 오지랖이란 걸 알면서도 과거의 내가 마음의 바닥에서 빛을 찾기 위해 수많은 책을 뒤졌던 것처럼 누군가 이 글을 읽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뭐라도 도움이 될 문장을 쓰고 싶다. 자기 과신일지도 모르지만 누군가를 수면 위로 안내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매달려보는 것이 나의 천성이다.

     

    자존감이 낮았던 시절 내가 주로 회상하던 과거는 구체적인 가난과 엄마와 아빠가 싸우던 순간, 그 사이에서 울던 동생과 나의 모습이었다. 그 과거가 지금의 못난 나를 만든 것 같다며, 바꿀 수도 없는 그 시간에 집착하며 울었다. 하지만 오늘날 내가 회상하는 과거는 서른 명이 넘는 가족끼리의 왁자지껄한 식사 시간, 이모와 이모부가 내어준 따스한 안식처, 기억을 나누며 함께 성장한 동생, 올바른 생각을 실천하는 귀여운 아빠와 자유로운 영혼인 엉뚱한 엄마와의 시간이다. 그 시간들이 내가 좋아하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것 같아 감사하다.

     

    사람의 인생이란 참으로 복합적이다. 인생 전체를 불행하다고도 행복하다고도 말할 수 없이 다양한 사건이 동시에 일어난다. 결국 나를 지배하는 기억이란 취사선택이 아닐까. 그리고 그 선택은 내가 주로 시간을 보내는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장소를 찾아 시간을 보내야 한다. 나에겐 바다가 그런 곳이었고, 덕분에 따스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행복이란 감정을 선택할 수 있었다. 내가 바다에서 느낀 다정이 모두에게 전해졌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당신이 행복하면 좋겠다

     

     

     

     

    글. 현혜원

    제일기획 10년 차 카피라이터이자 8년 차 서퍼. 근래에 찾아보기 힘들다는 ‘내가 하는 일이 즐겁고 삶이 만족스럽다’는 1인이다. 성공한 광고인만을 꿈꾸다가 서핑을 만난 이후 전혀 새로운 형태의 꿈을 꾸게 되었다. 제주에서 나고 자라 서울 도심에서 일하는 서퍼의 이야기를 매거진 [빅이슈]에 연재했고 이것이 이 책의 출발점이 되었다. 스무 살에 처음 접한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있으며, 무용수인 동생과 함께 사진전과 퍼포먼스를 함께 구성한 ‘계절 창고’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최근 작으론 <오늘의 파도를 잡아>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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