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드워드 리의 K-할머니와 냄비밥아하 에세이 2025. 1. 8. 10:28
아시아 식탁의 기본이자 선(禪)의 근본인 밥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내 어린 시절의 모든 식사마다 올라오던, 김이 모락모락 나고 쫀득하고 달콤하며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밥 한 그릇.
기억이라는 건 4~5세부터 시작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맹세컨대 눈만 감으면 이가 하나도 나지 않은 입속에 나를 달래며 넣어주던 따뜻한 전분 덩어리가 선사하는 그 편안한 감각을 다시 떠올릴 수 있다.강건하고 까다로운 우리 가족은 대대로 찰진 밥을 먹고 자랐고, 나 또한 마찬가지다. 밥은 나를 튼튼하고 똑똑하게 키웠고 수학과 과학, 역사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게 했다. 쌀은 내 시력을 예리하게 만들었고 치아는 가지런하게, 손톱에는 윤기가 흐르도록 해주었다. 그땐 착한 일을 하면 매콤한 돼지고기 요리를 갓 지은 밥 한 그릇에 얹어 먹을 수 있었다. 나쁜 짓을 하면 고양이 사료로 저녁을 먹게 될 거라는 경고를 듣기도 했다. 그렇다. 아시아계 이민자 가족은 알뜰한 영양 섭취를 위해 밥 위에 간장을 뿌리고, 고양이 사료를 올려 먹는다는 도시전설 같은 이야기다!
내 머릿속 깊은 곳엔 밥은 기적과 같다는 생각이 박혀 있다. 우리의 조지루시 밥솥은 매일 조용히 순종적으로 하얀 김을 내뿜었다. 명절이 되면 할머니가 밥솥에 팥과 밤을 넣기도 했지만 그 외의 모든 시간은 항상 동일했다. 가끔 믿음직한 밥솥이 고장 나 불빛이 깜빡거릴 때면 할머니는 전통 방식 그대로 무거운 냄비에 밥을 짓곤 했다. 하지만 냄비를 가스 불 위에 올리고 계속 지켜봐야 했기에 그 방식을 좋아하지는 않으셨다. 냄비 바닥에 밥이 들러붙어서 바삭바삭해지다 순식간에 타버리기 때문에 아무래도 실수를 하게 될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밥솥은 매번 똑같은 결과물을 내준다. 미리 세팅한 설정을 따라 버튼을 누르고 20분 후에 돌아오면 된다. 그 결과물은 항상 완벽하고 일정하다. 반면 가스 불 위에서 지은 밥은 위아래로 층이 나뉘어 있다. 가볍고 폭신한 밥 위에는 종이처럼 얇은 막이 생겨 있고, 아래쪽의 바닥은 바삭바삭하게 된다. 밥의 상태는 변덕스러웠고 밥맛 또한 매번 달랐다. 이 과정은 우리 할머니를 짜증나게 했다. 마치 가난과 혼란, 전쟁으로 점철된 할머니의 일생을 떠올리게 하는 듯이. 할머니는 밥솥의 현대적인 편리함을 좋아했다. 그 일관성은 할머니를 차분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밥솥으로 한 밥맛이 그렇게까지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계셨을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냄비에 밥을 지어야만 했을 때, 할머니가 냄비 바닥에 남은 갈색 누룽지를 집어 드시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하곤 했다. 그 바삭함은 정말이지 거부하기 힘들다. 불완전함이 선사하는 즐거움이라고나 할까. 어린 시절의 이 냄비밥은 내 음식 세계를 처음 소개하기에 가장 좋은 레시피다. 재료는 단 두 가지, 30분의 시간, 그리고 세심한 배려.
불완전한 밥 한 그릇을 위한 레시피
- 분량: 대형 밥그릇 4인분 또는 전채 크기 그릇 6인분
- 재료: 쌀(아시아 장립종 쌀) 2컵, 소금 1작은술
이 방법으로 밥을 지을 때는 냄비 바닥에 얇게 구워진 누룽지층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바삭한 누룽지와 폭신한 밥의 대조적인 질감이 일품이다.
나는 25cm 크기의 무쇠 프라이팬을 사용한다. 한식당에서 사용하는 돌솥을 구해도 좋지만 무쇠 프라이팬으로도 충분하다. 밥이 익는 동안 좋아하는 고명을 준비하자.
모두 완성되면 따뜻한 밥을 바삭한 누룽지까지 퍼서 나누어 담고 식사를 시작한다.① 대형 볼에 쌀을 담고 찬물 4컵을 붓는다. 물이 뿌옇게 될 때까지 손으로 쌀을 둥글게 휘젓는다. 채반에 밭쳐서 물기를 제거하고 쌀을 다시 볼에 담는다. 다시 찬물 4컵을 부어 30분간 불린다.
② 쌀을 다시 채반에 밭쳐서 물을 따라 낸 다음 잘 털어서 여분의 물기까지 제거한다. 25cm 크기의 무쇠 프라이팬에 쌀을 넣는다. 찬물 3컵을 붓고 소금을 뿌려 골고루 잘 섞은 뒤 중강 불에 올려 한소끔 끓어오르면 불을 최대한 약하게 낮춘 다음 딱 맞는 뚜껑을 닫고 18분간 익힌다. 불에서 내린 다음 뚜껑을 닫은 채로 10분간 뜸을 들인다.
③ 뚜껑을 열고 중간 불에 올려서 팬 바닥의 쌀이 노릇노릇하고 바삭바삭해질 때까지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3~5분간 가열한다. 이 밥은 먹기 전까지 팬에 담은 채로 따뜻하게 보관한다.✅ 글: 에드워드 리
2024 넷플릭스 최고의 화제작 <흑백요리사>에 출연해 매회차 독창적인 이야기가 담긴 창의적인 요리를 선보이며 심사단의 호평을 받는 한편, 이주자로서 정체성을 고민하며 한국인의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과 한식에 대한 사랑을 혼신을 다해 요리에 온전히 담는 모습으로 온 국민의 가슴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전통적인 요리법에 현대적인 감각을 더하고, 독창적인 요리 스타일과 깊이 있는 맛으로 전 세계 미식가들의 사랑을 받는 유명 셰프이자 작가인 그는 특히 자신의 뿌리인 한식을 기반으로 한 아시안 요리와 미국 남부 요리를 결합한 독특한 요리 스타일로 주목받고 있다.
2010년 <아이언 셰프Iron Chef> 우승으로 스타 셰프가 되었으며, <더 마인드 오브 어 셰프The Mind of a Chef>, <탑 셰프Top Chef>, <컬리너리 지니어스Culinary Genius> 같은 여러 유명 요리 대회와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대중들에게 얼굴을 알리고, 요리하는 사람으로서의 품격을 보여주었다. 2023년 4월 백악관 한미동맹 70주년 기념 국빈 만찬 셰프로 초청되었으며, 현재 켄터키주 루이빌에 위치한 레스토랑 ‘610 매그놀리아(610 Magnolia)’의 오너 셰프이기도 하다. 『스모크&피클스Smoke&Pickles』, 『버터밀크 그래피티Buttermilk Graffiti』, 『버번 랜드Bourbon Land』 세 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출처: 스모크&피클스 - 이균 셰프가 그리는 음식과 인생 이야기
본 사이트에 게재된 콘텐츠는 (주)위즈덤하우스에서 관리하고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되는 저작물입니다. 사전 동의 없는 무단 재배포, 재편집, 도용 및 사용을 금합니다. aha.contents@wisdomhouse.co.kr
'아하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리를 비우는 하루 by 마야 안젤루 (0) 2024.12.03 산을 이루는 경이의 존재를 감각하는 끝없는 여정 by 낸 셰퍼드 (3) 2024.09.25 참 오래 걸렸지, 이 모양의 나를 만나기까지 by 김민철 (0) 2024.07.22 그저 각자 자라는 속도가 다를 뿐 by 이소영 (0) 2024.06.11 나를 지킬 사람이 오로지 나뿐이라면 (0) 2024.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