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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심삼일도 삼세번이면 by 구달아하 에세이 2020. 12. 16. 13:26
엊그제 떡국을 먹은 기분인데 어느새 12월이다. 예년이라면 연초에 세운 야심찬 목표들은 단 하나도 이루지 못한 채 나이만 먹을 내가 한심해서 꺽꺽 울 타이밍이지만, 올해는 조금 다르다. 모닝 루틴을 주제로 이 원고를 쓰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아침을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해왔다. 프리랜서인 덕에 기상 시간이 불규칙하고, 현대인답게 눈 뜨자마자 스마트 폰부터 들여다보는 습관이 늘 문제였다. 두 가지를 고치는 방향으로 모닝 루틴을 짰다. ① 오전 9시에 일어나기. ② 커피 내리기. ③ 커피를 마시며 《전쟁과 평화》 20쪽 읽기. 새해가 밝기를 기다릴 필요 없이 당장 내일부터 새롭게 태어나는 거다. 한 해의 끝에 무언가를 시도한다는 생각에 의욕이 샘솟았다.
아침 9시에 울린 알람에 지체 없이 몸을 일으켰다. 전날 새벽 네 시에 잠든 탓에 눈이 잘 안 뜨이기는 했지만. 부엌으로 가서 물을 끓이고 원두를 가는 사이에 시야가 서서히 맑아졌다. 바로 이런 효과를 노리고 커피 내리기를 루틴에 넣은 것이지 후후. 나의 영민한 판단력에 뿌듯해하며 커피를 들고 책상에 앉았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삼 년째 완독을 시도 중이나 번번이 실패를 맛본 책이다. 그래서 골랐다. SNS 피드를 훑는 대신 독서로 아침을 열 수 있으니 좋고, 1,412쪽에 이르는 장편소설을 두 달 반 만에(71일) 독파할 수 있으니 또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책을 펼치자마자 주요 등장인물 소개가 3쪽에 걸쳐 이어졌다. 믿을지 모르겠다. ‘주요’ 등장인물은 41명이었다. 이름이 헷갈려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어쨌든 목표한 분량을 다 소화했다. 첫날 모닝루틴은 성공이다. 잽싸게 책장을 덮고 책상에서 벗어났다. 어쩐지 찜찜한 기분은 책갈피에 끼워둔 채로.
어김없이 9시에 울린 알람과 향긋한 원두 냄새. 둘째 날 아침이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내가 하룻밤 새 《전쟁과 평화》 속 등장인물 이름을 다 까먹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폴리트가 볼콘스키 공작 사위였나…?(바실리 공작 아들이었다) 리자와 리즈는 자매…?(리즈는 리자의 애칭이었다) 연신 책장을 앞으로 넘겨서 등장인물 소개를 훑고 또 훑었다. 커피로 살살 뜨게 만든 눈꺼풀이(전날도 새벽 네 시에 잤다) 셔터를 내리겠다고 아우성쳤다. 침대에 풀썩 몸을 던졌다. 3쪽 분량의 인물 소개를 한 다섯 번은 읽었으니 목표량을 채운 셈 쳐도 되겠지. 스르륵 감긴 눈을 번쩍 떴을 때는 해가 중천이었다.
셋째 날에는 알람을 끄고도 침대에 계속 누워 있었다. 모닝 루틴을 만들면 내 행동을 컨트롤할 수 있어 자신감이 생긴다고 들었는데, 기껏 만든 루틴을 삼 일 만에 깨는 쪽으로 내 행동을 컨트롤하고 있자니 자괴감이 들었다. 그래도 일어나기 싫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전쟁과 평화》를 펼치고 싶지 않았다. 긴 호흡으로 읽어야 하는 러시아 소설을 아침마다 20쪽씩 끊어 읽으려 한 게 실수였다. 겉보기에 그럴싸한 목표를 정하는 데만 급급했던 것 같다. 실수를 빠르게 깨닫고 인정하는 태도는 나의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다. 그리고 실수를 빠르게 포기와 연결시키는 경향은 나의 고질적인 단점이었다.
책을 구석에 처박고 알람을 꺼버린 상태로 이 글을 마무리하려니 다소 민망하다. 모닝 루틴으로 달라진 일상을 공유하며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거라는 건설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는데… 사람 참 쉽게 안 변한다는 진리만 궁상맞게 곱씹고 있다. 그런데 나는 정말 조금도 변하지 않았을까? 비몽사몽으로 읽은 《전쟁과 평화》에는 이런 문장이 쓰여 있었다. “저는 바랍니다. 이것이 컵을 넘치게 하는 마지막 물 한 방울이 되어주기를 말이에요.” 비록 작심삼일로 끝났지만 모닝 루틴을 시도한 경험은 늦잠과 스마트 폰이 전부였던 나의 아침에 커피 한 방울, 독서 한 방울을 똑똑 떨구어주었다. 내일 또 시도했다가 삼 일 만에 때려치운다 해도, 분명 삼 일치의 물방울은 채워질 것이다. 그렇게 작심삼일을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잘 짜인 습관으로 꽉 채운 아침을 맞이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방금 나는 아침에 읽을 전자책을 다운받았다. 《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 제목부터 흥미진진하다. 내일은 코스타리카 원두와 엘살바도르 원두가 온다. 2020년의 마지막까지 남은 날은 보름 남짓. 추리소설과 커피 향에 기대어 모닝 루틴 작심삼일을 두 번은 더 반복할 수 있는 시간이다. 작심삼일도 삼세번이면 컵 밑바닥쯤은 채우지 않을까? 내년의 나에게 빈 컵 대신 물 한 모금을 건넬 생각을 하니 움츠려들었던 가슴이 쫙 펴지는 듯하다.
written by 구달근면한 프리라이터. 생활비를 안정적으로 조달하기 위해 일주일에 사흘은 양말가게로 출근한다. ⟪아무튼, 양말⟫ ⟪읽는 개 좋아⟫ ⟪일개미 자서전⟫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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