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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지킬 사람이 오로지 나뿐이라면
    아하 에세이 2024. 3. 30. 13:35

    ⓒ현봄이, 교토의 햇살을 간직해

     

    회사 생활은 아무튼 불행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사회생활을 잘해왔는지도 모르겠다. 늘 겉돌았다. 당시에 친한 동료들은 있었지만 회사를 떠난 후 남은 사람은 거의 없다. 대학에서 전공한 분야를 직업으로 택했다면 조금 나았을까. 다른 방향으로 20대를 살 수 있었을까.

     

    월급쟁이라는 건 안정적이기 때문에 중독성이 강하다. 비슷한 일을 끊임없이 해내면 되는 것뿐이고, 이번 달에도 다음 달에도 적지만 고정적인 돈을 받을 수 있었다. 충분히 안도하고 지내도 괜찮았다.
    나는 서비스직에 종사했다. 좋은 손님들도 많았지만 나쁜 손님도 많았다. 한번은 어떤 손님과 마찰이 생겼다. 클레임 전화를 응대하던 중 상대방이 내게 심한 욕설을 했고 거기에 발끈해 "욕하지 마세요"라고 한 것이 화근이었다. 남자는 나를 가만두지 않겠다며 다음 날 회사로 찾아와 소란을 피웠다. 남자의 말에 따르면 내가 받는 월급에는 손님이 욕을 해도 참아야 하는 수당이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금시초문이었다. 비상식적인 사람은 세상에 너무나 많았고, 그럴 때마다 계단에 앉아 우는 날이 늘어났다.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버려진 강가에서 쓰레기와 함께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삶에서 중요한 것들을 모두 잃어버린 것 같았다. 웃음소리도 울음소리도 점점 커졌다. 극단적이고 드센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냥 쭉 여기에서 이대로 살아가도 괜찮은 걸까.
    같은 시기에 나는 연애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소원했지만 곁을 차지했다. 멈추어 있었다는 쪽이 더 가까웠다. 언젠가의 사랑하던 기억을 함께 갉아먹으며 지냈다. 서로를 괴롭히는 만남을 지속하던 어느 날. 문득 정신이 들었다. 그를 보내주어야겠다. 그에게서 나를 놓아주어야겠다. 우리에게 이별은 스스로에 대한 보호이자 마지막 남은 최선의 사랑이었다. 서로를 기쁘게 할 수 없는 사이였고, 함께 행복해지는 일은 더는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길었던 인연은 한순간에 끝이 났다.

     

    허전해진 시간은 교토에 찾아가는 것으로 채웠다. 그때만이 내 유일한 쉼이었다. 강변에 앉아 한없이 마음을 쏟아냈다. 몸을 던질 수 없었으니 마음이라도 도려내어 던졌다. 슬픔이 강물을 타고 내게서 멀어지는 걸 보고 있으면 한결 가벼워졌다. 나에게 유일한 구원은 교토로 떠나는 일뿐이었다. 짐을 싸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점점 내 안에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현실에서 불온한 기분을 버티는 나와 교토에 와서야 크게 숨을 쉬는 나.
    그즈음의 여행은 서글펐고, 느렸고, 아팠다. 흘려보내고, 털어내고, 이윽고 일어서는 모든 과정을 교토에서 보냈다. 두 다리가 힘을 되찾고 단단히 버티게 되었을 때, 이후 남은 생의 모든 선택을 내가 행복해지는 일에만 쏟기로 했다. 하나의 나를 택하는 것. 답은 정해져 있었다.
    퇴사 얘기가 마무리되고 총 38일 일정의 간사이행 항공권을 끊었다. 가서 질리도록 머물고 사진을 찍자. 긴 여행이 끝날 때쯤에는 더 이상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질 필요도 없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나를 해치는 일에 시간과 마음을 소모하지 않을 것. 남은 생은 오로지 나만을 위해 살아가자.

     

    출발하던 날 비가 내렸다. 비행기 창문을 툭툭 두드리는 빗방울에 지난날이 씻겨 내려갔다. 어떤 슬픔도 더 이상 내 앞에 멈춰 나를 주시하지 않고 지나간다. 밤하늘에는 따뜻하게 반짝이는 별이 스쳤다.
    서른넷이었다. 너무 늦었다는 말을 오천 번쯤 들었지만 남들이 그렇게 말할수록 더 달려들었다. 행복해질 기회가 수십 번도 더 남아 있을 것이 분명한 나이였다. 10년이 흐른 후 비슷한 상황에 놓여도 나는 같은 결정을 했을 것이다. 나를 지킬 사람이 오로지 나뿐이라면.

     

     

    ✅ 글: 현봄이.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며 연출자의 꿈을 키웠지만  사진을 찍는 취미만 남긴 채 졸업했다. 새로운 세상을 용감하게 탐험하는 여행보다는 일상에 녹아드는 형태의 느긋한 여행을 선호한다. 일기, 스크랩, 사진 등 기억하고 싶은 것을 오래 간직하는 기록인이기도 하다. (인스타그램 @bombyul)

    ✅ 출처: 교토의 햇살을 간직해 - 오래 보아야 아름다운 도시 교토에서 만난 작은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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